천주교

아산 공세리성당 — 세곡 창고 터에 세운 충청도 첫 본당, 이명래 고약이 시작된 곳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아산만이 가까운 언덕 위에 붉은 벽돌 성당 하나가 서 있습니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팽나무에 둘러싸여 사계절 내내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 주는 아산 공세리성당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곤 하는 이곳에는, 아름다움만큼이나 깊은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나라의 세금 곡식을 쌓아 두던 창고 터가 신앙의 터전이 되기까지, 그리고 한 프랑스 선교사가 만든 고약이 온 국민의 상비약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마침 지난 10월 8일은 1922년 이 성당이 축성된 지 꼭 104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 세곡 창고 '공세창' 자리에 선 성당

'공세리(貢稅里)'라는 마을 이름은 조선 시대 이곳에 있던 조창(漕倉), 곧 공세곶창·공진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충청도 내포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모아 두었다가 배로 한양까지 실어 나르던 중요한 포구였지요. 디지털아산문화대전에 따르면 대동법 시행 이후 조창의 기능이 점차 약해지다가 19세기 고종 때 폐지되었고, 지금도 마을에는 조운을 맡았던 관리들의 송덕비와 성벽 일부가 남아 있어 그 시절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한때 나라의 곡식을 지키던 창고 언덕이 이제는 신앙을 지키는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묘한 울림을 줍니다.

■ 박해가 끝난 뒤 충청도 첫 본당이 되기까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세리성당을 "박해기 이후 충청도에서 설립된 최초의 본당"으로 소개합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큰 타격을 입은 천주교회는 1886년 조불수호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이 다시 가능해지면서 조금씩 회복되었습니다. 1890년 내포 지역의 양촌과 예산 간양골에 본당이 세워졌는데, 1894년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의 혼란 속에 선교사들이 서울로 피신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1895년, 간양골 본당은 교통과 선교 여건이 더 좋은 공세리로 옮겨 오게 됩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에밀 드비즈(한국 이름 성일론) 신부가 이곳에 부임하면서 공세리 본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백과사전은 이 성당이 숨어 지내던 교회를 공공연히 드러내어 "긴 박해의 종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성당"이라고 평가합니다.

■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한 고딕 성당

드비즈 신부는 한 해 만에 서울로 발령받았다가 1897년 다시 공세리로 돌아와 30년 넘게 이 본당을 지켰습니다. 그는 공세창 언덕 일대를 사들여 1899년 8월 한옥 성당과 사제관을 지었고, 신자가 늘어 한옥 성당이 비좁아지자 1920년부터 새 성당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드비즈 신부가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해 2년여 만에 완성한 것이 지금의 고딕 양식 벽돌 성당입니다. 1922년 10월 8일 드브레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고, 성당의 수호성인은 성 베네딕도입니다. 이 성당은 대전교구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이후 지어진 합덕성당(1929년), 예산성당(1934년), 공주 중동성당(1936년)의 건축적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면의 높은 종탑, 반원 아치로 된 창과 출입구,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햇빛은 "고딕 양식의 한국적 재현"이라는 평을 받습니다. 성당과 옛 사제관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는 원형대로 복원되었습니다.

■ '성일론 고약'에서 '이명래 고약'으로

공세리성당에는 조금 특별한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익숙한 '이명래 고약'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아산문화대전에 따르면, 당시에는 피부에 종기가 나는 병이 흔했는데 드비즈 신부가 프랑스에서 배운 방법으로 원료를 구해 1906년 고약을 만들어 신자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의 한국 이름을 따 '성일론 고약'이라 불린 이 약의 제조법을 인천에서 온 가난한 신자 이명래가 배웠고, 그는 여기에 연구를 더해 '이명래 고약'을 만들었습니다. 이명래는 더 많은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언덕에 자리를 잡았고, 이 고약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항생제가 발달하면서 1980년대 이후 고약 산업은 쇠퇴했지만, 종기에 고약을 붙이던 기억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드비즈 신부는 1905년 조성학당을 세워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고, 흉년에는 소작료를 덜어 주며 가난한 이웃을 도왔다고 전해집니다.

■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성지

공세리는 성당이면서 동시에 성지이기도 합니다. 천주교 대전교구는 이곳을 조선 시대에 순교한 32위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소개합니다. 특히 이 지역 신앙의 상징이었던 박의서·박원서·박익서 삼형제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2007년에는 삼형제 순교자의 묘가 있던 자리에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졌고,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고쳐 공세리 성지박물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박물관에는 대전교구 최초의 감실을 비롯해 1,5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내포 지방 교우촌의 생활과 박해 시대 순교자들의 발자취, 6·25 전쟁 때의 고난까지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1950년에는 8대 주임 뷜토 신부가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순교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찾아가는 길

공세리성당을 둘러싼 300년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와 팽나무는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한국관광공사는 2005년 이곳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성당'으로 선정했고,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롯해 70여 편의 영화와 드라마, 뮤직비디오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 합니다. 한 해 2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대전교구 안내에 따르면 주일 미사는 오전 11시 30분, 평일 미사는 오전 11시(월요일 없음)이고, 박물관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열며 월요일에 쉽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평택IC나 송악IC에서 20분 남짓 거리이며, 가까이에 솔뫼성지·합덕성당·신리성지가 있어 내포 성지 순례 코스로 함께 돌아보기 좋습니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 고목 아래 붉은 벽돌 성당 앞에 서서 백 년 넘게 이어진 기도와 나눔의 시간을 조용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신자가 아니어도, 마음이 쉬어 가기 좋은 자리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세리성당」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356 , 디지털아산문화대전 「아산공세리성당」 http://www.grandculture.net/asan/toc/GC07101005 , 천주교 대전교구 「공세리성지·성당」 https://www.djcatholic.or.kr/home/pages/re_shrine_view.php?ids=shrine19 , 위키백과 「공세리성당」 https://ko.wikipedia.org/wiki/공세리성당 , 헤럴드경제 「순교자 넋 품고 고즈넉히 버티고 선 공세리 성당」 https://biz.heraldcorp.com/article/2024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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