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진암성지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앵자봉 기슭에 있는 천주교 수원교구의 성지로 '한국천주교회 발상지'로 불리는 곳입니다.** 1779년 겨울 권철신이 이끈 선비들의 강학 모임에 이벽이 눈길을 헤치고 찾아왔다는 기록이 이곳을 한국 천주교의 출발점으로 기억하게 했고, 지금은 이벽·권철신·권일신·이승훈·정약종, 이른바 '창립 선조 5위'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습니다.
선교사가 들어와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책을 읽던 젊은 선비들이 스스로 진리를 찾아 신앙에 이르렀다는 이야기. 한국 천주교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장면의 무대가 바로 천진암입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천주교 주교회의, 수원교구, 광주시 자료를 바탕으로 천진암성지 이야기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겠습니다.
천진암은 어떤 곳일까 — 앵자봉 아래 사라진 작은 암자
천진암(天眞菴)은 본래 앵자봉(해발 620m) 아래에 있던 불교 암자였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오래된 절로 여겨지고, 1847년 홍경모가 엮은 『중정남한지』에는 "천진암은 앵자산에 있는 오래된 사찰로, 종이를 만든다. 지금은 사옹원에 속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나라에 종이를 납품하던 절이었던 셈이지요.
다산 정약용은 열다섯 살 무렵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50년 가까이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고 광주시는 소개합니다. 그런 다산이 훗날 "절은 허물어져 옛 모습이 없어졌다(寺破無舊)"고 적었을 만큼 암자는 점점 쇠락했고, 결국 터마저 논밭이 되어 잊혀졌습니다. 1962년 남상철이 문헌과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천진암 터와 이웃 여주의 주어사 터를 다시 확인하면서 이 골짜기는 비로소 역사 속으로 돌아왔습니다.
1779년 겨울의 강학 — 눈 오는 밤 촛불 아래서
천진암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강학(講學)'입니다. 강학은 오늘날로 치면 합숙 학술 세미나에 가까운 모임으로, 당대의 학자 녹암 권철신이 이끌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같은 젊은 남인 선비들이 함께했습니다.
정약용이 쓴 「녹암 권철신 묘지명」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지난 기해년(1779)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할 때였다. 눈 오는 밤에 이벽이 찾아오자 밤새워 불을 밝히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그로부터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이른바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 눈길을 뚫고 한밤중에 도착한 이벽, 그를 맞아 촛불을 밝힌 선비들의 모습이 짧은 문장 안에 생생하게 담겨 있지요.
가톨릭신문 기사에 따르면, 천주교 쪽에서는 이 강학에서 유교 경전과 함께 『천학초함』에 실린 『천주실의』, 『칠극』 같은 서학서를 공부했고, 참가자들이 주일에 일을 쉬는 '파공'과 고기를 삼가는 '소재'를 실천하기도 했다고 봅니다.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 주교도 『조선순교사비망록』에 "조선 천주교회의 진정한 기원은 이벽의 강학이었다"고 적었다고 수원교구는 전합니다.
발상지를 둘러싼 학계의 신중한 시선
다만 공정하게 짚어 둘 점이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강학이 시작된 해를 두고 1777년(달레 『한국천주교회사』 기준)과 1779년(정약용 묘지명 기준)으로 의견이 갈린다고 소개합니다. 또 정약용의 두 묘지명에는 서학을 공부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서, 1779년 강학은 유학 중심이었고 천주교로의 관심은 그 뒤 차츰 깊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견해도 함께 적고 있습니다.
강학 장소 역시 천진암과 주어사 중 한 곳으로 확정하기 어렵고, 두 절을 오가며 열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2025년 발표된 한 연구는 주어사 발굴 성과를 근거로 강학의 거점이 주어사였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모였던 이들 대부분이 훗날 한국 천주교의 주역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이벽의 권유로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으니까요.
195년 만에 찾은 이벽의 묘, 창립 선조 5위 묘역
천진암이 성지로 가꾸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변기영 신부가 1975년 천진암 터 3,000여 평을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1983년까지 주변 땅 20만 평을 마련했습니다.
가장 극적인 일은 이벽의 묘를 찾은 것입니다. 1785년 세상을 떠난 뒤 잊혀 있던 이벽의 묘는 1979년 포천 화현리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어, 195년 만에 천진암으로 옮겨졌습니다. 변기영 몬시뇰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벽 성조의 묘를 찾은 것이 사제 생활 중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지요. 이어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이던 1981년에는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묘 곁으로 이장되면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묘역'이 완성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지금의 하남시 배알미동에서 성 정하상 바오로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토지 소유주가 파묘해 버리는 바람에 치아 1개와 뼈마디 2개 등 유해 일부만 겨우 수습해 모셨다고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는 전합니다. 지금은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복자 정철상 가롤로와 함께 '조선 교구 설립자 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100년 계획 대성당과 세계평화의 성모상
천진암성지에는 아주 긴 호흡의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입니다. 굿뉴스(가톨릭정보) 성지 소개에 따르면 대성당 공사는 1980년대에 시작되어 토목공사와 기초공사를 거쳐 2079년까지 마감공사를 마치고 3만 석 규모로 완성할 계획입니다. 강학이 열린 1779년으로부터 꼭 3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금은 대성당 터에 야외 미사를 드리는 돌 제대가 놓여 있습니다.
이 밖에도 1980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1994년 이벽을 기념하는 광암성당, 2011년 천진암 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2013년 6월에는 높이 22m의 세계평화의 성모상이 축복되었습니다. 해마다 6월이면 이곳에서 한국천주교회 창립 기념 미사가 봉헌되는데, 2024년 6월 24일에도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와 사제들이 대성당 터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가을에 걷는 천진암 순례길
천진암 계곡과 앵자봉은 경기도 광주 8경 가운데 제4경으로 꼽힐 만큼 풍광이 아름다워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특히 찾는 이가 많습니다. 성지 안 광암성당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르면 대성당 터와 성모상이 나오고, 그 위 오솔길로 10분 남짓 더 올라가면 전나무 숲 사이에 '이벽 성조 독서처 터'와 '천진암 강학당 터' 표석이 조용히 서 있습니다.
240여 년 전 눈 오는 밤, 촛불 아래에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선비들의 마음을 떠올리며 숲길을 걸어 보시면 어떨까요. 성지 문의는 수원교구 천진암성지(031-764-5953)로 하시면 됩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 천주교 강학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1603 , 천주교 수원교구 「성지소개 — 천진암성지」 https://www.casuwon.or.kr/holyland/intro/1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관련 성지」 https://www.cbck.or.kr/koreanmartyrs/Shrines/43 , 굿뉴스 가톨릭정보 「천진암 성지」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ctxtOrgNum=2327&menugubun=holyplace , 가톨릭신문 「한국천주교회 발상지, 천진암성지」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303210167171 , 광주시청 「천진암과 한국천주교」 https://www.gjcity.go.kr/portal/contents.do?mId=0101060400 , 굿뉴스 「천진암 성지 개발에 헌신한 변기영 몬시뇰」 인터뷰, 동아시아불교문화 「주어사와 천진암의 실체적 연구」(2025) https://doi.org/10.21718/eabc.2025.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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