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성 이시돌 목장 — 새끼 밴 돼지 한 마리로 제주 황무지를 일군 '푸른 눈의 돼지 신부'와 새미 은총의 동산 이야기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제주 서쪽 한림읍 금악리, 한라산 중산간의 너른 초원을 달리다 보면 말과 소가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장이 나옵니다. 초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 둥근 아치 지붕을 이고 선 낯선 회색 건물,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조용한 기도의 길. 이곳이 바로 성 이시돌 목장입니다. 관광지로 더 유명해졌지만, 사실 이 목장은 한 젊은 아일랜드 신부가 가난한 제주 사람들과 함께 황무지를 일궈 만든 '기도와 노동의 땅'이에요. 오늘은 디지털제주문화대전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지 자료, 굿뉴스 성지 안내, 연합뉴스와 한겨레 기사를 바탕으로 성 이시돌 목장과 맥그린치 신부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따라가 보겠습니다.

■ 1954년 봄, 성당도 없던 한림에 도착한 젊은 아일랜드 신부

연합뉴스에 따르면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는 192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54년 4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제주 한림본당에 부임했습니다. 미디어제주는 그를 한림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로 소개하지요. 그가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섬은 한국전쟁과 4·3을 거치며 물질적으로도, 마음으로도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한림에는 아직 성당 건물조차 없던 시절이었다고 해요.

신앙을 전하러 온 사제였지만, 그가 먼저 마주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야 마음에도 여유가 생긴다고 믿었던 그는, 제주 사람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그는 1973년 제주도 명예도민증을 받으며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의 제주 사람이 되었습니다.

■ 새끼 밴 돼지 한 마리에서 시작된 '돼지 신부님'

맥그린치 신부가 떠올린 것은 양돈이었습니다. 연합뉴스는 당시 제주에서는 흑돼지를 변소에서 키우다 보니 제대로 된 양돈이 어려웠다고 전합니다. 그는 인천에서 새끼를 밴 요크셔 돼지 한 마리를 사서 한림까지 데려왔는데, 이 한 마리가 훗날 한 해 돼지 3만 마리를 길러 내는 큰 양돈 목장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해요.

그는 젊은이들과 4-H 클럽을 만들고, '가축은행'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축산을 시작하면서 '푸른 눈의 돼지 신부님'이라는 별명이 붙었지요. 원희룡 당시 제주도지사는 추모 글에서 신부님이 이 별명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회고했습니다. 신부님 스스로는 "기술은 모자랐지만 도민들의 협동심과 성실성이 뛰어났다"고 공을 늘 제주 사람들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 황무지를 초원으로, 1961년 성 이시돌 중앙실습목장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 따르면 맥그린치 신부는 한라산 중산간의 드넓은 황무지를 목초지로 개간해, 1961년 11월 '성 이시돌'의 이름을 딴 중앙실습목장을 세웠습니다. 성 이시돌(이시도르)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농부 성인으로, 축일은 5월 15일이에요. 땅을 일구며 기도했던 농부 성인의 이름이 제주의 목장에 붙은 것이지요.

이후 목장은 쉬지 않고 자랐습니다. 1962년 비영리 사업을 위한 이시돌 농촌산업개발협회가 세워졌고, 1964년 4월에는 배합사료 공장이 가동되었습니다. 1969년에는 뉴질랜드에서 면양과 종돈을, 1972년에는 호주에서 소 968마리를 들여와 농가의 가축 개량을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1976년에는 개척농가 조성 사업이 마무리되었고, 1986년에는 치즈 가공 공장도 문을 열었습니다. 목장 안 농업기술연수원에서는 초지 조성과 가축 관리, 농기구 정비를 가르쳐 많은 인재를 길러 냈습니다.

■ 실 잣는 여성들과 제주 첫 신협, 사람을 지키는 일

신부님의 일은 목장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연합뉴스는 1950년대 말 가난한 집의 한 소녀 신자가 돈을 벌러 부산에 갔다가 숨진 일을 겪은 뒤,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한림수직'을 세웠다고 전합니다. 목장의 양털로 실을 잣고 옷감을 짜는 이곳에서 1,300여 명의 여성이 일했고, 한때는 전국에서 주문이 밀려들 만큼 이름을 날렸지요.

또 은행이 없어 계가 깨지고 높은 사채 이자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며, 1962년 제주 최초의 신용협동조합인 한림신협 설립을 이끌었습니다. 목장과 사업에서 생긴 수익으로는 병원, 양로원, 요양원, 유치원, 청소년 시설을 세웠고, 2002년 3월에는 성 이시돌 병원을 호스피스 중심의 성 이시돌 복지의원으로 다시 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가난한 환자도 존엄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고 해요.

■ 아치 지붕의 회색 집,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된 '테쉬폰'

목장에 가면 꼭 눈에 띄는 것이 물결처럼 둥근 아치 지붕을 가진 건물, '테쉬폰'입니다. 한겨레에 따르면 테쉬폰은 아치형 틀 위에 가마니 같은 거푸집을 펼쳐 깔고, 기둥과 철근 없이 시멘트 모르타르만 덧발라 짓는 공법이에요.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의 고대 도시 크테시폰에서 이름이 왔다고 합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고향 아일랜드에서 이 기술을 익혀 와, 자재가 귀하던 1960년대 초 숙소와 창고, 돈사로 지어 썼습니다.

뉴스핌 보도에 따르면 1961년에 지은 '제주 이시돌목장 테시폰식 주택' 2동은 제주에 남은 테쉬폰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보존 상태도 좋아, 2021년 국가등록문화재 제812호로 등록되었습니다. 당시 대한주택공사가 이 공법을 받아들여 보급하기도 해서, 우리나라 주택사에서도 의미 있는 건물로 평가받는다고 해요.

■ 묵주 모양 호수를 걷는 기도의 길, 새미 은총의 동산

목장 뒤편에는 천주교 제주교구의 대표 순례지인 '새미 은총의 동산'이 있습니다. 굿뉴스 성지 안내에 따르면 이곳은 세 오름에 둘러싸인 못이라는 뜻의 '삼뫼소'에서 시작되었고, 1992년부터 맥그린치 신부가 순례지로 본격 가꾸었습니다. 당시 김창렬 주교가 '은총의 동산'으로 이름 붙였고, 2009년 5월 15일 축복식과 함께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어요. '새미'에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어지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400미터가 넘는 묵주기도 호수 둘레에는 돌과 나무로 15단 묵주 모양이 꾸며져 있어, 호수를 한 바퀴 돌며 묵주기도를 바치면 자연스레 루르드를 본뜬 성모동굴 앞에 닿습니다. 대형 조각상으로 만든 십자가의 길 14처와 예수님의 생애 열두 장면을 담은 '예수님 생애공원'도 있지요. 2001년 10월 14일 봉헌된 삼위일체 대성당은 아일랜드식 켈틱 십자가 모양으로, 안에는 약 3천 명, 옥상에는 약 5천 명이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2018년 4월 23일, 90세를 일기로 선종했습니다. 장례미사는 그가 세운 삼위일체 대성당에서 봉헌되었지요. 막사이사이상과 국민훈장 모란장, 2014년 아일랜드 대통령상을 받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은 아마 지금도 초원 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일 거예요. 다음에 이시돌 목장의 초원을 걷게 된다면, 새끼 밴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한림에 왔던 젊은 신부를 잠시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출처: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이시돌 목장」 https://jeju.grandculture.net/jeju/toc/GC00711665 , 위키백과 「성이시돌목장」 https://ko.wikipedia.org/wiki/성이시돌목장 , 연합뉴스 「아일랜드인 맥그린치 신부가 낯선 땅 제주서 평생 일군 기적들」(2018.4.23) https://www.yna.co.kr/view/AKR20180423195300056 , 연합뉴스 「'푸른 눈의 돼지 신부' 맥그린치 제주에 사랑 가득 남기고 선종(종합2보)」(2018.4.23) https://www.yna.co.kr/view/AKR20180423188352056 , 미디어제주 「맥그린치 신부 선종, 각계 추모사 이어져」(2018.4.24) https://www.mediajeju.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145 , 한겨레 「제주 이시돌목장 테시폰식 건물 국가등록문화재 됐다」 https://www.hani.co.kr/arti/area/jeju/1001740.html , 뉴스핌 「제주 이시돌목장 '테시폰' 국가문화재 등재」(2021.7.1) https://www.newspim.com/news/view/20210701000698 , 굿뉴스 가톨릭정보 「새미 은총의 동산」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ctxtOrgNum=2382&menugubun=holyplace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매일미사 「전국 성지·순교 사적지·순례지 안내」 https://missa.cbck.or.kr/Shr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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