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명동 한복판, 쇼핑객으로 붐비는 거리를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붉은 벽돌의 뾰족한 종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인 명동대성당입니다. 명동대성당 누리집은 이곳을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이자 심장"이라고 소개하지요. 오늘은 이 성당이 어떤 땅 위에, 어떤 사람들의 손으로 세워졌는지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합니다.
■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자리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명동성당 터는 본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명동대성당 누리집은 이승훈, 정약용 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신앙 집회를 가지며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되었고, 이 공동체를 이끈 이들이 박해를 받았다고 전합니다. 세월이 흘러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맺어지자, 종교의 자유가 올 것을 내다본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이 땅을 성당 터로 사들였습니다. 블랑 주교는 먼저 이곳에 종현서당을 열어 예비 신학생을 길렀고,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이듬해인 1887년 5월 나머지 대지를 마저 사들였습니다.
■ 중국에서 온 벽돌공, 그리고 12년의 공사
하지만 공사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풍수지리를 내세운 정부와의 부지 소유권 분쟁으로 4년을 보낸 끝에 1892년 5월 8일에야 정초식을 가질 수 있었지요. 설계와 공사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직접 맡았는데, 그는 약현(지금의 중림동) 성당과 용산 신학교의 설계 감독도 맡은 분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을 기술자가 없어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중국에서 데려와야 했고, 재정난과 청일전쟁으로 공사가 멈추기도 했습니다. 1896년 벽체 공사가 끝날 무렵 코스트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프와넬 신부가 뒤를 이어 내부 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이 열렸습니다. 기공부터 헤아리면 무려 12년 만의 완공이었다고 명동대성당 누리집은 전합니다.
■ 장안의 명물 '뾰죽집'
높이 솟은 종탑을 처음 본 서울 사람들에게 이 성당은 무척 신기한 건물이었나 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명동성당이 '뾰죽집'이라는 이름으로 장안의 명물이 되어 날마다 많은 구경꾼이 몰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가유산청 자료를 보면 건물은 십자형 평면에 본당 높이 23m의 순수한 고딕식 구조이고, 우리나라 최초로 벽돌을 쌓아 지은 교회입니다. 쓰인 벽돌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으로 모양이 20여 종에 이르고, 붉은색과 회색 두 가지 색을 알맞게 섞어 조화로운 모습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순교자를 품은 기도의 집
명동대성당이 특별한 까닭은 아름다운 건축 때문만은 아닙니다. 명동대성당 누리집에 따르면 성당 지하 묘역에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믿음을 지킨 순교자들의 유해가 모셔져 왔습니다. 화려한 명동 거리 바로 곁에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이들의 이야기가 조용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인지 신자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들러 잠시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 마치며
한 사람의 집에서 시작된 작은 신앙 공동체가 120여 년 넘게 서울 한복판을 지키는 성당이 되기까지, 그 사이에는 박해와 분쟁, 전쟁과 재정난을 견뎌 낸 수많은 손길이 있었습니다. 다음에 명동에 가실 일이 있다면 붉은 벽돌 하나하나에 담긴 시간을 떠올리며 종탑을 한번 올려다보시면 어떨까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울 명동성당」(encykorea.aks.ac.kr),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서울 명동성당」(digital.khs.go.kr), 명동대성당 누리집 「명동대성당 역사」(mdsd.or.kr), 국가기록원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명동성당」(theme.archives.go.kr)
댓글 0
댓글은 승인된 회원만 쓸 수 있어요. 로그인 · 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