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천주교에서 '묵주 기도 성월'로 지내는 달입니다. 이 무렵이면 충북 음성의 작은 읍내, 감곡의 언덕 위 붉은 벽돌 성당에 묵주를 손에 쥔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집니다. 바로 '한국의 루르드'라고도 불리는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흔히 감곡성당 또는 매괴성당이라 부르는 곳입니다. 명성황후가 피신했던 집터, 한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 전쟁의 총탄 자국이 남은 성모상까지, 이 성당에는 130년 가까운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천주교 청주교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지 자료, 가톨릭신문과 음성신문의 보도를 바탕으로 그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 '매괴'라는 이름에 담긴 뜻
먼저 이름부터 풀어 볼까요. 매괴(玫瑰)는 한자어로 묵주를 뜻하는 말입니다. 음성신문 탐방 기사에 따르면 라틴어로는 로사리움(Rosarium), 곧 향기로운 '장미 꽃다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묵주기도 한 단 한 단을 장미 한 송이처럼 성모님께 엮어 바친다는 마음이 담긴 이름이지요. 그래서 이 성당의 주보, 곧 수호성인은 '매괴(묵주기도)의 성모'입니다.
성당 뒤편 언덕의 이름도 매산(玫山)으로, 가톨릭신문은 이를 '장미의 언덕'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성당 이름과 산 이름, 주보 성인이 모두 장미와 묵주로 이어져 있으니, 처음부터 성모님께 바쳐진 자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 대궐 같은 집을 바라보며 바친 기도
이야기는 1894년 봄,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젊은 선교사 임 가밀로(Camille Bouillon, 부이용) 신부가 경기도 여주 부엉골 본당에 부임하면서 시작됩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그는 1869년 성모 발현지로 유명한 프랑스 루르드에서 20㎞ 남짓 떨어진 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루르드를 자주 찾으며 사제의 꿈을 키웠습니다. 1893년 사제품을 받고 그해 곧바로 조선에 들어왔지요.
부엉골은 유서 깊은 교우촌이었지만 너무 외진 산골이라 본당 자리로는 마땅치 않았습니다. 새 터를 찾던 그는 장호원에 이르러 산 밑의 대궐 같은 집 한 채를 보고 이곳이 본당 자리로 가장 알맞다고 직감했다고 합니다. 청주교구가 전하는 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 집은 명성황후의 육촌 오빠 민응식의 집으로,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몸을 피했던 곳이었습니다. 음성신문은 109칸에 이르는 큰 집이었다고 전합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이 집은 의병들의 거처가 되었다가 일본군과의 싸움 속에 불타 폐허가 되었고, 임 신부는 이 터를 헐값에 사들일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1년 4개월 만인 1896년 5월, 마침 성모성월의 일이었습니다. 청주교구는 그해 묵주 기도의 모후 축일인 10월 7일에 본당이 설립되었다고 소개하고, 백과사전은 같은 해 9월 17일 임 신부가 거처를 옮기면서 '장호원본당'이 설립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충청북도에 처음 세워진 천주교회의 출발이었습니다.
■ 명동성당을 닮은 붉은 벽돌 성당
처음 성당은 한옥과 서양식을 섞은 목조 기와 건물이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03년에 지은 이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10칸, 80평 규모였습니다(주교회의 성지 자료는 1904년 완공으로 적고 있습니다). 신자가 늘자 임 신부는 같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시잘레(Pierre Chizallet) 신부에게 설계를 맡겼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공사를 맡아 1930년 지금의 고딕식 붉은 벽돌 성당이 완성되었습니다.
길이 40m, 너비 15m, 종탑 높이 36.5m의 이 성당은 국가유산청 해설처럼 서울 명동대성당의 축소판 같은 인상을 줍니다. 정면에는 세 개의 종탑이 서 있고, 가운데 종탑의 첨탑이 길게 하늘로 뻗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팔각 석조 기둥이 늘어선 삼랑식 공간이 펼쳐집니다. 가톨릭신문은 이 성당이 임 신부의 프랑스 고향에 있던 작은 성당과도 닮았다고 전했습니다.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이던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습니다.
■ 일곱 군데 총탄 자국이 남은 성모상
제대 정면 가운데에는 이 성당의 주보인 매괴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1930년 새 성당 축복에 맞춰 프랑스 루르드에서 만들어 온 성모상입니다. 1950년 6·25전쟁 때 성당을 점령한 인민군이 이 성모상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백과사전과 성지 자료는 성모상이 일곱 발의 총탄을 맞았다고 전합니다. 위키백과에는 속이 빈 석고상인데도 깨지지 않았고, 그때 성모상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신자들 사이에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선명한 일곱 개의 탄흔을 두고 신자들은 성모님이 겪은 일곱 가지 고통, 곧 '성모칠고'를 떠올린다고 합니다. 전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품은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이지요.
일제강점기 말에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1943년 일본인들이 성당보다 높은 매산 중턱에 신사를 지으려 터를 닦자, 임 신부는 공사 터에 '기적의 패'를 묻고 공사가 멈추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이후 공사는 더 나아가지 못했고 곧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 자리에는 1955년 성모광장이 들어섰고, 2018년에는 프랑스 루르드의 것과 같은 크기와 모양의 성모동굴이 봉헌되었습니다.
■ 51년의 사목, 학교와 성체거동
임 가밀로 신부는 1896년부터 1947년까지 51년 동안 이곳을 지켰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려면 먼저 글을 깨우쳐야 한다고 여겨 1907년 매괴학당을 세웠고, 1912년에는 여학교를 열었습니다. 이 학교들은 지금의 매괴여자중학교와 매괴고등학교로 이어졌습니다. 일제 말에는 적국인 프랑스 출신이라는 이유로 용산 신학교에 연금되어 본당을 떠나야 했지만, 해방 뒤 다시 감곡으로 돌아왔습니다.
1914년에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체거동, 곧 성체를 모시고 행렬하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이 전통은 지금도 해마다 10월 첫 주 목요일 '성체현양대회'로 이어집니다. 가톨릭신문은 이것이 우리나라 성체대회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전합니다. 미사를 봉헌한 뒤 성체를 모시고 매산으로 오르는 행렬, 산 정상에서의 성체강복과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차례로 이어집니다.
1947년 10월 25일, 임 신부는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기도를 되풀이하며 세상을 떠났고 성당 안 예수성심상 소제대 가까이에 잠들었습니다. 성당 마당의 동상 아래에는 그가 늘 신자들에게 하던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 순례길에서 만나는 것들
1934년에 지은 화강석 2층 사제관은 2002년 매괴박물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에는 1914년 첫 성체거동 때부터 쓰인 성광과 금색 제의, 임 신부가 신던 구두와 식사 때 쓰던 포크, 본당의 옛 문서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감곡성당은 충북 지역의 모본당으로서 15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해 '성소의 요람'으로도 불립니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이곳을 '매괴성모순례지'로 공식 선포했습니다. 1991년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 성모순례지 지정이었습니다. 성모광장을 지나 십자가의 길 14처를 따라 매산 정상에 오르면, 2008년 축복된 큰 십자가와 성모상 너머로 감곡 읍내와 장호원의 너른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가을빛이 깊어지는 10월에 이 언덕을 천천히 걸어 보는 건 어떨까요. 장미 꽃다발처럼 엮인 130년의 기도와,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다는 한 신부의 마음이 조용히 말을 걸어올지도 모릅니다. 순례 미사나 박물관 관람 시간은 바뀔 수 있으니 방문 전에 성당(043-881-2808)에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음성 감곡성당」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001 , 천주교 청주교구 성지소개 「매괴성모순례지」 https://www.cdcj.or.kr/parish/holyland/11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성지와 사적지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 https://app.catholic.or.kr/web/holyplace/?seq=2384 , 국가유산청 「음성 감곡성당」 https://m.khs.go.kr/public/commentary/culSelectDetail.do?ccbaAsno=0001880000000&ccbaCpno=&ccbaCtcd=33&ccbaKdcd=21&menuId=03 , 가톨릭신문 「[순례, 걷고 기도하고] 청주교구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41014500037 , 가톨릭신문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 (4)청주교구 감곡성당과 매괴박물관」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202160099035 , 음성신문 「(탐방)감곡매괴성당, 일본탄압과 6.25 시련도 버텨내」 https://www.u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253 , 위키백과 「감곡성당」 https://ko.wikipedia.org/wiki/감곡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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