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땅에 살았던 스님 가운데 이름만 들어도 따뜻한 느낌이 드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원효(元曉, 617~686)예요. 경산 불지촌에서 태어나 혈사에서 70세로 입적하기까지, 그는 어려운 교리를 쉬운 노래로 바꾸고, 서로 다투던 학설을 하나로 이어 주며, 거리의 사람들 곁으로 걸어 나온 사상가였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삼국유사』 등에 남겨진 기록을 따라, 원효의 삶과 '일심·화쟁·무애'라는 세 낱말을 차분히 살펴볼게요.
■ 압량군에서 태어난 소년, 서당
원효의 속성은 설씨이고, 아명은 서당(誓幢)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남동신 집필)에 따르면 그는 617년 압량군, 곧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불지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 잉피공, 아버지 담날 나마의 집안이었고, 오랫동안 6두품으로 여겨져 왔지만, 근래 당나라 금석문 자료를 근거로 신분 논의가 다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활동한 7세기는 신라가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며 고대국가를 정비하고, 고구려·백제와 오랜 전쟁을 거쳐 삼국 통일을 이루어 가던 격동의 시대였습니다. 골품제가 사회를 강하게 규정하던 때, 원효는 혈연과 힘의 논리 바깥에서 진리를 찾고자 출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출가한 사찰 이름과 정확한 시기는 현존 전기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출가 초기에는 참기 등 외도의 서적을 읽어 동시대 승려들에게 배척당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 당나라로 가려다 멈춘 길, 그리고 깨달음
650년, 서른네 살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 문하로 유학을 시도했습니다. 육로를 이용한 첫 시도는 실패했고, 이후 해로로 다시 떠나던 중 직산(樴山)에서 깨달음을 이루어 유학을 단념하고 경주로 돌아왔다는 것이 민족문화대백과의 정리입니다. 민간에는 어두운 무덤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뒤, 낮에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만법을 만든다'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일화가 『삼국유사』 계열로 널리 전해지기도 합니다. 설화의 색채가 짙지만, '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핵심이라는 점에서 원효의 일심사상과 잘 맞물리는 이야기예요.
경주로 돌아온 뒤에는 '배움에 일정한 스승이 없다'는 말처럼 혜숙, 혜공, 낭지, 대안 등 여러 선지식과 어울리며 배웠습니다. 이들은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경주 안팎의 일반 백성에게 불교를 알리던 대중화 운동가들이었고, 원효도 계율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은 채 자유로이 어울렸습니다. 그 파격 때문에 백고좌회 참석이 기성 교단의 반대로 좌절되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 요석공주, 설총, 그리고 거사의 길
태종무열왕 대(654~661)에 원효는 요석궁의 과부 공주와 인연을 맺고 아들 설총(薛聰)을 낳았습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가 먼저 뜻을 밝히고 무열왕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설화적 색채가 있지만, 왕실이 처벌하지 않았고 훗날 신문왕이 설총을 관료로 발탁한 점으로 보아 그 인연이 중대 왕실에 의해 공인받았다는 해석이 민족문화대백과에 실려 있습니다.
오계 가운데 불사음계를 범한 뒤 원효는 더 이상 승려 신분을 유지할 수 없어 스스로 환속하고 거사를 자처했습니다. 소성거사(小性居士)라 불리며 속인의 옷차림으로 마을을 다녔고, 광대가 큰 표주박을 들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구절을 따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며 교화했다고 『삼국유사』와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해설이 전합니다. 가난하고 글 모르는 이들도 부처님의 명호를 알고 염불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일연의 찬탄은, 원효가 교리를 책상 위에만 두지 않았다는 증거예요.
■ 일심·화쟁·무애 — 원효 사상의 세 기둥
원효 사상은 일심(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체라고 민족문화대백과는 설명합니다.
일심은 『대승기신론』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세계관입니다. 우주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 일심이고, 모든 인간의 마음은 하나(같다)라는 평등한 시선이지요.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와 『기신론별기』를 남겨 중관과 유식의 대립을 넘어서려 했고, 그의 소는 중국·일본에서 '해동소(海東疏)'라 불리며 동아시아 불교학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화쟁은 다툼을 화해로 바꾸는 논리입니다. 원효 시대의 신·구역 불교 갈등, 특히 중관파와 유가파의 공유쟁론을 화회시키려 했고, 그 결실이 『십문화쟁론』에 집약되었습니다. 화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보살의 이타행, 곧 중생 제도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고려의 의천은 그를 '화쟁국사'로 추봉했고, 분황사에는 화쟁국사비가 세워졌습니다.
무애행은 『화엄경』 구절을 따 이름 붙인 대중 교화의 실천입니다. 환속 이후 천촌만락을 떠돌며 화전민, 분황사 노비, 푸줏간 주인 같은 하층민에게 정토신앙과 칭명염불을 권했습니다. '걸림 없는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가르침을, 노래와 몸짓으로 전한 셈이지요.
■ 70여 부 저술과 동아시아로의 울림
환속 뒤 사찰에서 문도를 기르기는 어려웠기에 원효는 저술과 중생 제도에 힘을 쏟았습니다. 알려진 저서는 대략 70여 부 150권 남짓이고, 그중 일부나마 전하는 것은 13부 16권가량입니다.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가 대표적입니다. 『화엄경소』는 분황사에서 찬술하다 십회향품에 이르러 절필했다는 『삼국유사』 기록이 있고, 자리행을 이타행으로 회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강삼매경론』은 문무왕 때 황룡사 강경의 강의 노트로 보이며, 성공적인 강경으로 신라 불교계의 중심에 복귀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의 글은 중국·일본, 심지어 인도 불교계에도 전해졌고, 법장이 원효에게 힘입어 동아시아 화엄학을 집대성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진나보살', 일본에서는 '구룡대사'로 불렸으며, 신라 흥륜사 교단은 그를 10대 성인의 하나로 추앙했고, 고려에는 해동종(분황종)이 그를 교조로 삼아 출현하기도 했습니다. 686년 3월 30일 혈사에서 입적한 뒤에도, 고선사서당화상비처럼 환속 거사를 위해 국가 차원의 고승비가 세워진 드문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원효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
원효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로만 세상을 가르지 않았습니다. 서로 다른 견해의 뿌리를 살펴 불이(不二)로 잇고, 어려운 말을 쉬운 노래로 바꾸어 이웃 곁에 두었습니다. 분열과 다툼이 잦은 오늘날에도, 화쟁의 눈과 무애의 발걸음은 여전히 따뜻한 이정표가 되어 줍니다. 경주 분황사 모전탑 곁을 지나거나, 원효의 이름을 담은 책 한 줄을 펼칠 때면, 1,300년 전 거리의 표주박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효'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90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쟁사상'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4858 , 국사편찬위원회 '원효의 행적과 불교사상' https://contents.history.go.kr/id/hm_040_0020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분황사 관련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g_005r_0020_0110
제작자: 신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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