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면 남도의 산사들이 하나둘 붉은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합니다. 그중에서도 해마다 가을이면 꼭 이름이 오르내리는 절이 있지요. 전라남도 장성 백암산 자락의 백양사입니다. 잎이 아기 손바닥처럼 작고 빛깔이 고와 '애기단풍'이라 불리는 단풍, 그리고 두 계곡이 만나는 자리에 선 누각 쌍계루가 연못에 비치는 풍경은 많은 분들이 사진으로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한국학호남진흥원의 글, 불교신문·법보신문·연합뉴스·현대불교 보도, 장성군 문화관광 안내를 바탕으로 백양사가 품은 이야기와 올가을 단풍 소식을 차분히 전해 드리겠습니다.
■ 백암사에서 정토사로, 그리고 '흰 양'의 절이 되기까지
백양사는 오랫동안 백암사, 또는 정토사라는 이름으로 문헌에 등장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377년 정도전이 지은 「백암산정토사교루기」에 '신라 때 어떤 이승(異僧)이 처음 절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백암사라 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기록에는 백제 때 여환 스님이 창건했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백과사전은 이 창건 연대에 대해서는 역사적 신빙성이 거의 없다고 조심스럽게 적고 있습니다. 오래된 절일수록 전설과 기록이 섞여 전해지기 마련이니, 두 이야기를 함께 알아 두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이름을 얻은 것은 1574년(선조 7) 환양 선사 때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의 글은 환양 선사가 설법할 때 하얀 양이 다소곳이 앉아 법문을 들었다고 하여 백양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한편 불교신문은 옛 경전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를 '백양'이라 불렀다는 데서 이름이 비롯됐다는 해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흰 양의 전설이든 수행자의 뜻이든, 이름 안에 '법을 듣고 마음을 맑힌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는 점은 같아 보입니다.
■ 쌍계루, 스님과 선비가 마주 앉았던 누각
절 들머리에서 가장 먼저 발길을 붙드는 곳이 쌍계루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문화유산 자료에 따르면 쌍계루는 운문암 계곡과 천진암 계곡의 물이 만나는 곳에 세워져 '두 계곡의 누각'이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1350년 각진국사가 처음 세웠는데 1370년 큰비에 무너졌고, 1377년 청수 스님이 다시 세웠습니다.
이 누각에는 고려 말 지식인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한국학호남진흥원의 글에 따르면 1377년 2월, 유배 중이던 정도전이 정토사를 찾아 주지 청수 스님과 누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기문을 지었습니다. 정도전은 "훗날 누각에 오르는 사람은 산수 풍경이 뛰어난 것만 취하지 말고 앞사람의 공덕이 이어져 왔음을 알아야 한다"는 말로 글을 맺었다고 하지요. 이후 목은 이색이 '쌍계루'라는 이름과 기문을 지었고, 포은 정몽주가 시를 남겼습니다.
누각 안에는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사암 박순, 노사 기정진 등이 남긴 현판 180여 개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는 이곳이 종교와 사상을 넘어 스님과 선비들이 소통하고 교류했던 화합의 공간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쌍계루는 여러 차례 다시 지어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탔고, 1985년 복원된 뒤 2009년 해체해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 백학봉과 애기단풍, 물 위에 두 번 피는 가을
쌍계루 뒤로 하얀 바위 벽을 드러낸 봉우리가 백학봉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장성 백양사 백학봉'은 백양사와 백학봉 일대의 암벽과 숲 경관이 아름다워 2008년 2월 5일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예로부터 대한 8경의 하나로 꼽혀 왔습니다. 백학봉의 모습은 대웅전과 쌍계루에서 잘 보인다고 합니다.
가을이면 이 풍경에 애기단풍이 더해집니다. 장성군 문화관광 안내는 백양사 단풍이 여느 지역보다 잎 자체가 작고 색이 고와 애기단풍이라 불린다고 소개합니다. 바람이 잦아든 날 연못 건너편에 서면 누각과 흰 바위 봉우리, 붉은 단풍이 수면에 한 번 더 비쳐 보이는데, 여행타임즈(2026.10.12)는 공기가 가라앉는 아침 시간에 반영이 또렷하게 잡히는 편이라고 전했습니다. 같은 기사는 주차장과 매표소에서 쌍계루까지 약 0.8km 길이 단풍나무 가지가 머리 위에서 맞닿아 터널처럼 이어지고, 오르내림이 거의 없어 천천히 걸어도 15분 안쪽에 닿는다고 소개했습니다.
■ 비자나무 숲과 고불매, 사계절 내내 이어지는 풍경
백양사의 자연이 가을에만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사찰 일대의 비자나무 숲은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약 3만 그루가 밀집해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이 숲 덕분에 '춘백양 추내장(春白羊 秋內藏)', 곧 봄에는 백양사, 가을에는 내장산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설명합니다. 이웃한 정읍 내장산과 백양사가 계절마다 서로 이름을 주고받는 셈이지요.
봄에는 매화가 기다립니다. 1947년 고불총림을 결성할 때 '고불매(古佛梅)'라는 이름을 얻은 백양사의 매화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백과사전은 백양사가 일대에 1,5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이라고도 소개합니다. 단풍철에 다녀오신 분이라면, 이른 봄 매화 필 무렵 다시 찾아 같은 길을 다른 빛깔로 걸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 '고불총림'의 정신, 부처님의 옛 뜻으로 돌아가자
일주문에서 만나는 '고불총림'이라는 말에는 근현대 한국불교의 한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17년 백양사를 중창한 만암 종헌 스님(1876~1956)은 30년 가까이 주지를 맡아 강원을 열고 인재를 길렀습니다. 해방 뒤인 1947년 2월에는 일제의 불교를 걷어내고 한국 전통 불교를 회복하자는 뜻으로 '고불총림'을 표방했습니다. '고불(古佛)'이라는 말처럼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수행하자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총림은 선원과 강원, 율원 같은 수행·교육 기관을 두루 갖춘 큰 수행 도량을 말합니다. 연합뉴스와 법보신문 보도에 따르면 백양사는 1996년 서옹 스님 당대에 한해 운영한다는 조건으로 총림에 지정되었고, 2019년 11월 6일 조계종 중앙종회가 총림 요건 미비를 이유로 지정 해제를 의결해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당시 백양사와 지역사회는 결정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현대불교 인터뷰에서 교구장 무공 스님은 "총림은 제도가 아니라 정신"이라며, 지금도 고불선원과 운문선원을 운영하며 수행의 근본을 지켜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름이 바뀌어도 수행의 뜻은 이어 간다는 말이 참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 올가을 백양사를 찾으실 분들께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백양사 애기단풍은 10월 중·하순부터 물들기 시작해 10월 하순에서 11월 중순 사이 가장 짙어지는 편입니다. 장성군은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매년 10월 말~11월 초에 백양사 일대에서 산사음악회 등 행사를 열어 왔는데, 올해 정확한 일정은 장성군 문화관광 누리집 공지로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행타임즈에 따르면 백양사는 2023년 5월 문화재 관람료가 폐지된 뒤 입장료를 받지 않고, 주차장도 요금 없이 운영됩니다. 다만 절정기 주말에는 진입로와 주차장이 붐비니 오전 일찍 들어가시면 한결 여유롭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백양사는 관광지이기 전에 스님들이 수행하는 도량입니다. 전각 안에서는 기도하는 분들을 배려해 조용히 움직이고, 사진은 예불 중인 분들의 얼굴이 담기지 않게 찍어 주세요. 쌍계루 앞에서 정도전의 말처럼 풍경만이 아니라 앞사람들이 이어 온 마음까지 함께 담아 오신다면, 올가을 단풍 나들이가 조금 더 깊어질 것 같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암산 백양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21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성 백양사 백학봉」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9821 , 한국학중앙연구원 HeritageWiki 「백양사 쌍계루」 https://dh.aks.ac.kr/~heritage/wiki/index.php/백양사_쌍계루 ,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백양사 쌍계루, 문화공간의 변주」 https://www.hiks.or.kr/HonamHeritage/18/read/355 , 불교신문 「'스님' 노릇 잘하는 공동체 만드는 18교구 백양사(上)」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21512 , 법보신문 「조계종 중앙종회, 고불총림 지정해제 결의」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831 , 연합뉴스 「백양사 고불총림 지정 해제 결정에 지역사회 반발」 https://www.yna.co.kr/view/AKR20191111091600054 , 현대불교 「[24교구본사를 가다] 수행과 포교로 일구는 '모범백양'」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04035 , 장성군 문화관광 「백양사 산사음악회」 https://www.jangseong.go.kr/home/tour_new/festival/festival_04/festival_04_05 , 여행타임즈 「800m 단풍터널 걸으니, 누각이 물에 그대로 비쳐요」(2026.10.12) https://www.traveltimes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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