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한경직 목사 — 피난민 27명과 세운 영락교회, 템플턴상 시상식의 신사참배 고백과 '아름다운 빈손' 이야기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5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한경직(韓景職, 1902년 12월 29일~2000년 4월 19일) 목사는 1945년 12월 2일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 27명과 함께 서울 중구에 영락교회(처음 이름 베다니전도교회)를 세운 장로교 목회자입니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고,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뿐이었다고 유족이 밝혀 '아름다운 빈손'이라는 별명으로 기억됩니다. 다만 군사정권 옹호와 서북청년회 창립 관여는 지금도 비판받는 대목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들도 '영락교회', '월드비전', '숭실대학교'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거예요. 이 세 곳 모두에 한경직 목사의 이름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위키백과 「한경직」, 「영락교회」 항목에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꼽히면서도 동시에 무거운 질문을 남긴 한 사람의 생애를 차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평원의 농가 장남, 오산학교와 숭실을 거쳐 프린스턴으로

한경직은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한도풍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청주, 호는 추양(秋陽)입니다. 어린 시절 선교사가 세운 진광소학교에서 처음 기독교 신앙을 접했고, 남강 이승훈이 세운 정주 오산학교를 제10회로 졸업했습니다. 1919년에는 평양 영성소학교 교사로 일했고, 1922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이과에 입학했습니다.

숭실을 마친 그는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캔자스주의 장로교 계열 학교인 엠포리아 대학교를 거쳐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예일대학교 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폐결핵에 걸려 뉴멕시코 앨버커키 요양원과 덴버에서 2년 6개월 동안 투병했습니다. 학자의 길 대신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 바로 이 병상에서였다고 전해집니다.

신의주 제2교회와 보린원 — 고아와 노인을 돌본 첫 목회

1932년 귀국한 그는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 숭실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다가 1933년 신의주 제2교회 전도사로 부임했고, 이어 평안북도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1935년에는 신의주 매지동에 건평 360평의 2층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1939년 5월에는 고아와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을 돌보는 보린원을 세웠습니다. 1942년 일제 당국이 유학생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를 목회지에서 내쫓자, 그는 보린원 원장으로서 고아와 노인을 돌보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윤하영 목사 등과 함께 신의주자치회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지만, 소련군정 아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2017년에는 그와 윤하영 목사가 1945년 9월 26일 무렵 소련군 점령지의 실상을 미군정에 알린 영문 청원서가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27명에서 6000명으로 — 영락교회의 시작

1945년 12월 2일, 한경직 목사는 서울 영락동에 있던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 건물을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 27명과 함께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베다니전도교회, 지금의 영락교회입니다. 교회는 1년 만에 1500명으로 늘었고, 1946년 11월 이름을 영락교회로 바꿨습니다. 1947년에는 한국 최초로 주일 예배를 2부로 나누어 드렸고, 1949년에는 교인이 6000명에 이르렀습니다.

1950년 5월 350평 규모의 2층 석조 예배당이 거의 완성되었지만 곧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교회당을 지키던 김응락 장로와 김창화 집사가 공산군에게 목숨을 잃었고, 부산·대구·제주로 흩어진 교인들은 피난지마다 부산영락교회(1951), 대구영락교회(1951), 제주영락교회(1952)를 세웠습니다. 영락교회는 1980년 주일예배 성도 2만 명을 넘기며 흔히 대한민국 최초의 대형교회로 불립니다. 지금 주소는 서울 중구 수표로 33이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서울노회에 속해 있습니다.

학교와 복지 — 대광, 영락, 숭실 재건, 그리고 월드비전

한경직 목사는 교회를 넘어 교육과 복지에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영락보린원을 세워 고아를 돌보고 대광중·고등학교를 세웠으며, 1950년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건했습니다. 1953년 영락고등공민학교, 1954년 영락모자원, 1959년 영락중·고등학교가 차례로 문을 열었습니다.

모교 숭실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평양에서 스스로 문을 닫았던 숭실을 서울에서 다시 세우는 일에 앞장섰고, 1954년부터 1958년까지 제6대 숭실대학 학장을 지냈습니다. 또 기독교아동복지회(CCF) 이사장,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이사장을 맡아 전쟁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일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195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영락교회는 첫 해외선교사로 최찬영 선교사를 태국에 보냈습니다.

템플턴상 시상식에서 한 고백 — "저는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

1973년 원로목사로 물러난 뒤에도 그는 한국교회진흥원, 군복음화운동후원회 등을 이끌었습니다. 1992년 4월 29일에는 종교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템플턴상 수상자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오래 기억하게 만든 것은 상보다 그 뒤에 나온 한마디였습니다. 1992년 6월 18일 수상 축하 감사예배에서 그는 "저는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앞에서 죄인이며 신사참배도 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며, 일제강점기의 신사참배를 제대로 참회하지 못한 것이 일생의 짐이었다고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한국교회 원로가 공개적으로 친일 행적을 고백한 일은 교계와 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습니다.

남한산성의 작은 집과 '아름다운 빈손', 그리고 남은 비판

은퇴 후 그는 25년 동안 남한산성의 작은 우거처에서 지냈습니다. 2000년 4월 19일 98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葬)으로 장례를 치른 뒤 영락공원묘지에 묻혔습니다. 유족은 그가 남긴 것이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와 생필품이 전부였다고 밝혔습니다. 2011년 KBS 1TV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제목도 「한경직 목사의 아름다운 빈손」이었습니다. 생전에 자서전 청탁을 여러 번 거절했던 그의 구술은 훗날 『나의 감사』(2010, 두란노)라는 책으로 묶였습니다.

한편 균형 있게 짚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위키백과는 그가 해방 직후 서북청년회 창립에 관여했고,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을 방문해 정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군사정권을 옹호했다는 점이 비판받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청빈과 섬김의 모범으로 존경받는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아픈 장면과 맞닿아 있는 인물이라는 점까지 함께 기억할 때 그의 생애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 중구 수표로를 지나다 보면 석조 예배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피난민 27명의 예배로 시작된 그 교회 이야기, 그리고 빈손으로 떠난 한 목사의 고백을 한 번쯤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한경직」 https://ko.wikipedia.org/wiki/한경직 , 위키백과 「영락교회」 https://ko.wikipedia.org/wiki/영락교회

👉 신이말했다 카페 가입하고 새 글 알림 받기: https://cafe.naver.com/910401
사이트: https://sinimalhaetda.com
카카오채널: http://pf.kakao.com/_XrLFX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댓글 0

댓글은 승인된 회원만 쓸 수 있어요. 로그인 · 회원가입

[광고] 수원 청소업체 더원클린 010-9982-6805
광고 · 우리 사이트에 업체를 홍보하고 싶다면 카톡으로 광고 문의
💬 카톡 1:1 상담+ 카톡 채널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