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윤동주 「십자가」와 「서시」 — 장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시인,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를 바라본 신앙 고백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장로교 장로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기독교 가정 출신이고, 1941년 5월 31일에 쓴 시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조용히 피를 흘리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20일에 쓴 「서시」와 함께 이 시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에 실렸고, 윤동주는 광복을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는 구절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도 거의 외우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이 시를 쓴 청년이 어떤 신앙의 마을에서 자랐고, 교회당 꼭대기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어떤 시를 남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위키백과, 위키문헌에 실린 1955년판 시집 원문을 바탕으로 윤동주의 신앙과 시를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동방을 밝히는 마을' 명동촌, 교회와 학교가 함께 선 고향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동촌은 1899년 함경도 출신의 김약연, 김하규, 문병규 등이 140여 명의 식솔을 이끌고 이주해 세운 마을로, 이름에는 '동방을 밝히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도 이 마을에 합류했습니다.

처음 이 마을은 유학을 따르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런데 김약연이 명동학교를 세우고 교사로 정재면을 초빙했을 때, 정재면은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게 해 달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김약연은 며칠을 고민한 끝에 장로교로 개종했고, 훗날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명동촌에는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에서도 신앙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독실한 장로교 장로였고, 아버지 윤영석은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해 명동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윤동주가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은진중학교와 숭실, 신사참배를 거부한 학교에서 배우다

윤동주는 1925년 명동소학교에 들어가 고종사촌 형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만들었습니다. 1932년 가족이 용정으로 옮기자 1920년에 세워진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35년에는 평양 숭실중학교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1월 숭실학교의 교장 조지 S. 맥퀸(한국 이름 윤산온)이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해 교장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고향 친구 문익환과 함께 용정의 광명학원 중학부로 돌아가 졸업했습니다. 신앙을 지키는 일이 학교의 운명까지 바꾸던 시대를 열아홉 살 학생이 직접 겪은 셈입니다.

연희전문 시절, 「십자가」를 쓰다

1938년 4월 윤동주는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친구 문익환 목사는 훗날 윤동주가 자신보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에 더 해박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졸업을 반년쯤 앞둔 1941년 5월 31일, 윤동주는 「십자가」를 썼습니다. 1955년 정음사판 시집의 표기를 한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읍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햇빛이 교회 첨탑 끝의 십자가에 걸려 있는데, 시인은 그 높이까지 올라갈 길을 찾지 못하고 서성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연에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기꺼이 피를 흘리겠다고 조용히 다짐합니다. 괴로움을 겪은 예수를 '행복한' 분이라고 부른 대목은 지금도 많은 독자와 신앙인들이 오래 머무는 구절입니다.

「서시」와 하늘을 우러른 청년, 그리고 후쿠오카

같은 해 11월 20일 윤동주는 제목 없이 한 편의 시를 썼고, 이것이 훗날 시집 첫머리에 놓인 「서시」가 되었습니다. 그는 졸업 무렵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 했지만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필로 세 부를 만들어 그중 하나를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습니다.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성공회가 운영하는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그해 10월 교토의 도시샤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도시샤대학은 조합교회가 운영하는 개신교 학교였고, 그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곳이기도 했습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을 앞둔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1945년 2월 16일 새벽, 만 27세(우리 나이 28세)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유해는 고향 용정에 묻혔고, 할아버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해 두었던 흰 돌이 그의 비석이 되었습니다.

시집이 되어 돌아온 시, 오늘 찾아갈 수 있는 곳

정병욱이 지켜 낸 원고와 유족이 보관한 시들은 1948년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간행되었습니다. 초간본에는 정지용의 서문과 함께 31편이 실렸고, 1976년 3판에서는 모두 116편으로 늘어났습니다.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 교정에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고, 1990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지금은 연세대학교 핀슨홀의 윤동주기념관과 서울 종로구 청운동의 윤동주문학관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고, 2016년에는 영화 「동주」로도 그의 삶이 소개되었습니다.

교회당 꼭대기의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묻던 청년은, 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습니다. 올가을 밤하늘의 별을 보신다면, 「서시」와 함께 「십자가」의 마지막 연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동주」(박철희 집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94 , 위키백과(한국어) 「윤동주」 https://ko.wikipedia.org/wiki/윤동주 , 위키문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정음사판) 「십자가」·「서시」 원문(저작권 보호기간 만료 자료) https://ko.wikisource.org/wiki/하늘과_바람과_별과_시_(1955년)/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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