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디트리히 본회퍼 — 값싼 은혜를 경고한 목사, 나치에 맞선 고백교회와 플로센뷔르크에서 남긴 마지막 말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년 2월 4일~1945년 4월 9일)는 나치 독재에 맞서 고백교회를 세운 독일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로, 1943년 4월 5일 체포되어 2년 가까이 갇혀 지내다가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39세로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1937년에 쓴 『나를 따르라』의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라는 말은 지금도 설교와 신앙 서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에서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라는 문장을 들어 보신 분이 많으실 거예요. 이 말을 남긴 사람이 바로 본회퍼입니다. 오늘은 위키백과(한국어·영어)에 정리된 자료를 바탕으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길을 두 번이나 내려놓은 한 목사의 짧은 생애를 차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정신과 의사 집안의 여섯째, "그렇다면 내가 바꾸겠습니다"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지금의 폴란드 브로츠와프인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카를 본회퍼는 이름난 정신과 의사였고, 어머니 파울라는 교사로 자녀들에게 성경 이야기와 노래를 가르쳤습니다. 디트리히는 쌍둥이 여동생 자비네와 함께 여덟 남매 가운데 여섯째와 일곱째로 태어났습니다.

열네 살에 신학자가 되겠다고 하자 형들은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그때 그가 "그렇다면 내가 바꾸겠습니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적고 있습니다. 튀빙겐과 베를린에서 공부한 그는 1927년 12월 17일, 스물한 살의 나이에 논문 『성도의 교제』로 베를린 대학교 신학 박사가 되었습니다.

뉴욕 할렘의 흑인 교회에서 배운 것

1930년 그는 뉴욕 유니언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흑인 신학생 프랭크 피셔의 소개로 할렘의 아비시니안 침례교회에 다니며 주일학교를 가르쳤고, 인종차별 속에서도 뜨겁게 예배하는 흑인 교회를 평생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목사 장 라세르를 만나 산상수훈을 깊이 묵상하게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1931년 독일로 돌아온 그는 그해 11월 15일, 스물다섯 살에 베를린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히틀러 집권 이틀 뒤의 라디오 연설과 고백교회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이틀 뒤 본회퍼는 라디오 연설에서 '지도자(퓌러)'를 우상처럼 떠받들면 그가 '유혹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방송은 도중에 끊겼습니다. 같은 해 교회 안에서도 유대계 목회자를 몰아내는 '아리아인 조항'이 통과되자, 마르틴 니묄러 등과 함께 맞섰고 이 흐름이 고백교회로 이어졌습니다. 1934년 고백교회가 받아들인 바르멘 선언은 "교회의 머리는 지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1933년 가을 그는 베를린 동부의 교구 자리를 거절하고 런던 시드넘과 화이트채플의 독일어 교회 두 곳을 맡아 떠났습니다. 스승처럼 여기던 칼 바르트는 "교회 집에 불이 났는데 다음 배로 당장 돌아오라"며 크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런던에서도 그는 국제 교회 모임에서 나치에 동조하는 '독일 그리스도인' 운동에 맞서 사람들을 모았고, 베를린의 니묄러와 비싼 국제전화로 연락을 이어 갔습니다. 1935년에는 인도로 가서 간디에게 비폭력 저항을 배울 기회도 있었지만, 바르트의 꾸중을 떠올리며 독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1935년부터 그는 핀켄발데에서 고백교회 목회자를 기르는 신학교를 이끌었습니다. 게슈타포가 1937년 9월 이 신학교를 폐쇄한 뒤에도 그는 시골 마을을 옮겨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나를 따르라』와 『신도의 공동생활』은 바로 이 시절의 공동체 생활에서 나온 책입니다.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나를 따르라』는 산상수훈을 풀어 쓴 책입니다. 본회퍼는 회개 없는 용서의 설교, 고백 없는 성찬, 제자의 삶이 빠진 신앙을 '값싼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값비싼 은혜는 "우리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에 값비싸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부르기 때문에 은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치르신 은혜이니 결코 싸구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문장도 이 책에 나옵니다.

2주 만에 돌아온 미국, 그리고 감옥에서 쓴 편지

1939년 6월 그는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으로 다시 미국에 갔습니다. 전쟁을 피해 머물 수 있는 자리였지만, 2주 만에 마음을 돌려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라인홀트 니부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시대의 시련을 내 민족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뒤 독일의 그리스도인 삶을 다시 세우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썼습니다.

돌아온 뒤 그는 공개 연설과 출판을 금지당했고, 매형 한스 폰 도나니를 통해 군 정보국(압베어)에 들어갔습니다. 이 기관의 작전으로 유대인들이 스위스로 피신하도록 도운 일이 체포 서류에 적힌 이유였습니다. 영어 위키백과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그가 어디까지 관여했는지는 지금도 연구자마다 해석이 갈린다고 정리합니다. 체포 석 달 전인 1943년 1월 13일 그는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와 약혼했고, 테겔 감옥에서 1년 반 동안 가족과 친구에게 쓴 편지는 훗날 『옥중서간(저항과 복종)』으로 묶였습니다.

"이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1945년 4월 8일 그는 증인도 변호인도 없는 즉결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마지막 주일 예배를 마치고 끌려가면서, 함께 갇혀 있던 영국인 페인 베스트에게 영국의 벨 주교에게 "이것이 끝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 그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등과 함께 처형되었고, 그 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전쟁은 끝났습니다.

지금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20세기 순교자' 조각들 가운데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와 나란히 그의 조각상이 서 있고, 그가 설교했던 시드넘 교회는 1958년 다시 지어지며 '디트리히 본회퍼 교회'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감옥에서 쓴 시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는 1970년 지크프리트 피츠의 곡이 붙어 널리 불렸고, 2021년 독일에서 가장 사랑받는 찬송으로 뽑혔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으로 많이 부릅니다. 쉬운 길 대신 따름의 길을 고른 그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신앙을 한 번 더 돌아보게 합니다.

출처: 위키백과 「디트리히 본회퍼」 https://ko.wikipedia.org/wiki/디트리히_본회퍼 , Wikipedia "Dietrich Bonhoeffer" https://en.wikipedia.org/wiki/Dietrich_Bonhoeffer (Bethge·Metaxas·Marsh 전기,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자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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