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정동 언덕에는 1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켜 온 붉은 벽돌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 건물은 140여 년 전 이 땅에 처음 문을 연 서양식 근대 학교 '배재학당'의 흔적입니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한 사람이 두 칸짜리 방의 벽을 헐어 교실을 만들고, 두 명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된 학교이지요. 오늘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배재학당」·「배재학당역사박물관」 항목과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그리고 언론 보도를 바탕으로 배재학당 이야기를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 두 칸 방에서 시작된 학교 — 1885년 8월 3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배재학당은 미국 북감리회 선교부의 선교사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H. G. Appenzeller, 1858~1902)가 세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입니다. 아펜젤러는 1885년 6월 21일 인천으로 두 번째 입국한 뒤 7월 19일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한 달 먼저 와 있던 의사 스크랜턴(W. B. Scranton)의 집 한 채를 사서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작은 교실을 만들었고, 그해 8월 3일 이겸라·고영필이라는 두 학생을 맞아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역사넷은 이 두 학생이 원래 제중원 직원이었다고 전합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힌 두 사람을 스크랜턴이 아펜젤러에게 보내 영어를 배우게 했고, 이후 정부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에서 영어를 배우던 학생 세 명이 더 들어왔다고 합니다. 의사의 꿈을 품은 청년 둘이 앉아 있던 작은 방이 한국 근대 교육의 첫 교실이 된 셈입니다.
■ 고종이 내린 이름 '배재' — 인재를 기르는 집
미국 공사에게서 아펜젤러의 교육 사업 이야기를 들은 고종은 "조선 인민을 가르치는 일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며 반겼다고 우리역사넷은 기록합니다. 학교는 1886년 6월 8일 정식으로 수업을 시작했는데, 아펜젤러는 이때 학생이 6명이었고 같은 해 10월 6일에는 재학생이 20명으로 늘었다고 적었습니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은 고종이 직접 지어 내렸습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뜻이지요. 당대의 명필 정학교가 현판 글씨를 썼고, 외무아문의 김윤식을 통해 전달되었다고 백과사전은 전합니다. 다만 이름을 내린 날짜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백과사전은 1886년 6월 8일로 적고 있지만, 우리역사넷과 양화진 교회사 연표는 1887년 2월 21일로 기록합니다. 선교신문 연재 「아펜젤러 행전」은 아펜젤러의 일기에 1887년 2월 21일 현판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며, 6월 8일은 학교를 다시 연 날이고 그래서 이날이 개교기념일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아펜젤러는 그날 일기에 이것이 정부가 우리 학교를 인정한 것이라며 기쁨을 적었다고 합니다.
■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 — 배재의 교훈
배재학당의 학당훈은 '욕위대자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 곧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백과사전은 이 말이 마태복음 20장 26~2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왔다고 설명합니다. 높은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를 먼저 가르친 이 한 문장이 오늘날까지 배재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학교 운영에도 이런 정신이 묻어 있었습니다. 수업료는 한 달에 3냥이었고, 학비가 없는 학생에게는 일자리를 주어 스스로 벌게 했습니다. 1888년에는 자조부를 두어 고학하는 학생들이 학교 구내를 돌보고 지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학생들에게 복음을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학교생활과 수업 곳곳에서 기독교 정신을 전하려 애썼다고 백과사전은 적고 있습니다.
■ 영어, 천문, 야구, 그리고 토론 — 새로운 배움의 풍경
배재학당에서는 한문과 영어를 비롯해 천문·지리·생리·수학·수공·성경 같은 서양식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1897년 이 학교를 둘러본 영국인 비숍 여사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교육적·도덕적·지적 영향을 미쳐 온 기관은 배재학당"이라고 평했습니다. 체육 시간에는 야구·축구·정구·농구 같은 서양 운동도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토론과 연설입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지리를 강의한 것을 계기로 학생 모임 '협성회'가 만들어졌고,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 규칙을 익히며 시국 문제를 놓고 토론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이 모습을 두고 "듣기에 너무 즐겁다"고 반겼습니다. 1887년에는 늘어나는 학생을 위해 르네상스식 벽돌 교사도 지어졌습니다.
■ 한글 활자로 찍은 성경과 신문 — 정동 언덕의 출판소
배재학당은 학교이면서 출판의 중심이기도 했습니다. 1889년 중국에서 오래 선교한 올링거(F. Ohlinger)를 불러 활판소를 맡기고 한글 활자를 주조해 성서를 인쇄했습니다. 1892년에는 목판으로 『천로역정』을 펴냈고, 1897년에는 『조선 그리스도인의 회보』를, 1898년에는 학생 기관지 『협성회회보』와 일간지 『매일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이곳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이름도 낯익습니다. 우리역사넷은 안창호, 이승만, 신흥우, 주시경, 지청천 등을 배재 출신으로 꼽고, 이들이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일제강점기 항일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고 설명합니다. 백과사전 역시 배재가 구한말 교육구국운동의 선구 역할을 하고 일제강점기에도 한글을 지켜 냈다고 평가합니다.
■ 지금도 만날 수 있는 배재 — 동관과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887년에 지은 첫 벽돌 교사는 불타 사라졌지만, 1914년 5월 착공해 1916년 3월 준공한 '동관'은 지금도 원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건물은 2001년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08년 7월 24일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개관 당시 보도에 따르면 박물관에는 1930년대 교실을 재현한 전시실과 함께 고종이 내린 '培材學堂' 현판, 유길준의 친필 서명이 담긴 『서유견문』, 『협성회회보』, 『독립신문』,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 아펜젤러의 친필 일기 등이 전시되었습니다. 관람 안내에 따르면 박물관은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에 문을 열고, 일요일·월요일과 6월 8일 개교기념일 등에는 쉽니다. 가실 때는 공식 안내를 한 번 더 확인해 보세요.
가을 햇살이 고운 날, 정동길을 걸으며 붉은 벽돌 동관 앞에 잠시 서 보시면 어떨까요. 두 칸짜리 교실에서 영어 단어를 따라 읽던 두 청년과, "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던 수많은 학생들의 이야기가 조용히 들려올 것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배재학당」(손인수 집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91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배재학당역사박물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9863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배재학당」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1410 , 양화진아카이브 교회사연표 「고종, 배재학당 교명 하사」 https://yanghwajinarchives.org/s/site/item/75694 , 선교신문 「[아펜젤러 행전] 배재학당 현판 하사 날에 대한 오류」 https://missionews.co.kr/news/583568 , 뉴스와이어 「정동골 배재학당 동관 역사박물관으로 탈바꿈」(2008) https://www.newswire.co.kr/newsRead.php?no=348915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협력망 「배재학당역사박물관」 https://www.much.go.kr/cooperation/net/app.do
👉 신이말했다 카페 가입하고 새 글 알림 받기: https://cafe.naver.com/910401
사이트: https://sinimalhaetda.com
카카오채널: http://pf.kakao.com/_XrLFX
![[광고] (주)아크 반려동물 용품 OEM 생산 010-6298-5336](/static/ads/ark_oem_banner_wide.jpg?v=2)
댓글 0
댓글은 승인된 회원만 쓸 수 있어요. 로그인 · 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