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주기철 목사 —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사각오’의 순교자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5

1897년 경남 웅천에서 태어난 한 목회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 “우상숭배”라며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이어 가다가 여러 차례 검속되었고, 끝내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전하는 주기철(朱基徹) 목사의 생애는, 믿음과 양심을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의 길고도 조용한 싸움입니다. 오늘은 그 기록을 따라 그의 발자취를 천천히 살펴보려 합니다.

■ 웅천에서 오산학교로 — 신앙과 민족을 배우던 시절

주기철은 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창원시 진해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주기복이었고, 아버지 주현성은 지역 아전 출신으로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주현성이 첫 부인과 사별한 뒤 재혼한 조재선입니다. 어려서 한문을 배운 뒤 1906년 웅천 개통학교에 들어가 1912년까지 초등교육을 받았고, 맏형 주기원을 따라 1910년 성탄절부터 웅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환점은 1912년, 춘원 이광수가 웅천에서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의 학생 모집과 학교 후원을 위해 강연을 했을 때였습니다. 감명을 받은 그는 1913년 오산학교에 입학해 1916년 제7회로 졸업했습니다. 오산학교에서 조만식·이승훈 선생을 통해 신앙과 애국·민족정신을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16년 4월에는 서울의 조선예수교대학교(연희전문학교의 전신) 상과에 잠시 진학했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1917년 10월, 훗날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동지가 된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김해읍교회 교인인 안갑수와 결혼하였고, 1919년 이전에 웅천교회 집사가 되었습니다.

■ 김익두 부흥회에서 목회자의 길로

1920년 9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그는 ‘중생의 체험’을 하였고, 같은 해 11월 웅천교회 사경회에서도 큰 은혜를 받았다고 백과사전은 전합니다. 기독교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습니다. 1921년 12월 문창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신학 청원을 허락받은 뒤, 1922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미국·호주·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국내 최대 규모의 신학교였고, 그는 신입생이면서도 학생회 부서기를 맡았습니다.

1923년 봄부터는 경남노회 소속 양산읍교회 조사로 첫 목회에 발을 들였고, 1925년 12월 22일 제19회로 졸업한 뒤 같은 달 30일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첫 담임지는 부산 초량교회(1926년 1월 10일~1931년 7월)였습니다. 노회가 운영하는 경남성경학원 강사로도 후진을 가르쳤고, 훗날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조용학 영수, 옥고를 치른 손양원 목사 등이 이곳에서 성서를 배웠습니다. 초량교회 시무 중 경남노회 부노회장을 지냈고, 마산 문창교회로 옮긴 뒤에는 1932년과 1933년 노회장에 선출되었습니다. 명설교가로도 이름이 나 평양신학교 부흥회 등 각지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1933년 5월 부인 안갑수가 34세로 병사하고 이듬해 8월 부친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1935년 마산교회 집사 오정모와 재혼한 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초청을 받아 담임목사로 부임했습니다. 산정현교회에는 조만식·유계준·오윤선 장로 등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이름을 남긴 이들이 출석하고 있었고, 그는 부임 직후 교회당 건축에 착수해 1938년 헌당을 준비했습니다.

■ 산정현교회에서 맞선 신사참배 강요

1930년대 후반, 일제는 기독교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평양의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등이 폐교 위기에 몰리던 시절, 주기철은 신사참배를 신앙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로 여기며 거부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1938년 봄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경찰서에 1차 구속되었고, 헌당식 직전에도 검속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같은 해 8월 다시 검속되어 1939년 1월 29일 대구경찰서에서 석방되었습니다. 평양대부흥 자료는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한 1931년경부터 그가 이 쟁점과 씨름해 왔다고 봅니다.

석방 후에도 건강은 크게 나빠졌지만, 산정현교회에서 설교를 이어 갔습니다. 검속 기간 동안 저녁 예배를 도왔던 번하이젤(C. F. Bernheisel) 선교사가 계속 힘을 보탰습니다. 일제 경찰의 압력을 받은 평양노회가 1939년 10월,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목사·장로의 주일 설교·기도를 막으려 해도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같은 해 10월 중순 다시 구속되었다가 1940년 4월 20일 풀려났고, 그해 9월 20일 새벽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신사참배 거부자가 한꺼번에 검거될 때 마지막 검속을 당했습니다. 평양노회는 그를 목사직에서 파면하는 결의를 하였고, 산정현교회도 폐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기념 자료에 따르면 1940년 3월경 교회당이 완전히 닫히고 가족은 목사관에서 추방되기도 했습니다.

■ ‘일사각오’와 다섯 가지 기도

주기철의 신앙을 상징하는 말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일사각오(一死覺悟)’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을 지키겠다는 결단의 표현으로, 1935년 평양신학교 학생 부흥회 설교 등에서 그의 메시지와 함께 전해집니다. 석방 후 산정현교회에서 전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기원)」도 교인들에게 깊이 남았습니다. 기독일보가 다큐멘터리 보도와 함께 정리한 다섯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려 했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경찰의 감시가 더욱 짙어졌고, 결국 목사직 파면과 교회 폐쇄, 장기 수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설교는 내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의 일’이라는 태도로 기억되는 그의 모습은, 강요된 예식 앞에서 신앙의 자리를 지키려 했던 한 세대의 선택을 보여 줍니다.

■ 옥중에서 마친 47년의 삶, 그리고 추모

1940년 이후 약 5년간 평양 감옥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44년 4월 13일 병감으로 옮겨졌습니다. 4월 21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그날 밤 9시경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백과사전은 이를 옥중 순교로 기록합니다. 유해는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는 기념 자료가 전하며, 오정모 사모는 1947년 유암으로 소천하였습니다.

해방 후 그의 삶은 한국 교회와 독립운동사 양쪽에서 기억되었습니다. 1963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 등이 그의 행적을 소개하며, 산정현교회의 전통과 함께 ‘일사각오’의 신앙을 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신사참배 거부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손양원 목사와 함께 한국 교회에서 깊이 존경받는 목회자로 꼽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서울산정현교회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신앙 선조로 그를 기리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순교자로 소개합니다.

■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

주기철 목사의 이야기는 화려한 기적담이 아닙니다. 오산학교에서 배운 신앙과 민족애, 문창교회 부흥회에서 받은 소명, 초량·문창·산정현을 거치며 쌓아 온 목회, 그리고 신사참배 앞에서 끝내 무릎을 꿇지 않았던 선택이 이어진 삶입니다. 강요된 예배와 양심의 충돌 앞에서 그가 선택한 길은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은 훗날 많은 이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학교와 교회가 닫히고, 노회의 결의마저 그를 파면하던 시절에도 설교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어쩌면 아주 단순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믿는 일을, 끝까지 지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평양의 옛 산정현교회 자리는 멀리 있지만, 그의 설교와 기도, 옥중의 침묵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라는 압박 앞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아니다”라고 말했던 한 목회자의 이야기를, 우리는 여전히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양심의 자리를, 주기철이라는 이름은 조용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기철」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3200 , 기독일보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 삶」(다큐 보도) 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66264 , 평양대부흥 「주기철 목사의 참배 거부와 순교」 http://www.kich.org/news/articleView.html?idxno=2774 , 서울산정현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신앙의 선조들」 http://sjhpc.or.kr/Page/Index/541 ,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 http://www.jugicheol.or.kr , 위키백과 「주기철」 https://ko.wikipedia.org/wiki/주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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