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1907년 '평양대부흥'입니다. 평양 대부흥운동, 1907년 대부흥운동, 또는 '한국의 오순절'이라고도 불리지요. 1903년 원산의 작은 성경공부 모임에서 시작된 회개의 불씨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크게 타올랐고, 전국의 교회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은 평양대부흥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무엇을 남겼는지, 차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 시작은 원산, 한 선교사의 고백
평양대부흥의 뿌리는 1903년 여름 원산에 있습니다. 여자 선교사들이 중심이 된 작은 사경회(성경공부 모임)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R. A. Hardie)가 성경공부를 인도했습니다. 한국 선교 13년 차였던 하디는 선교가 잘되지 않아 지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르치던 중, 문제는 밖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선교사가 먼저 무릎을 꿇자 교인들도 마음을 열었습니다. 서로 미워하던 이들이 화해하고, 예전에 잘못 가져간 것을 되돌려주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정부 돈을 갚은 한 전도사에게 '양심전(良心錢)'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 교파를 넘어 함께 드린 기도
하디의 부흥회는 1904년 개성, 서울, 평양, 인천 등으로 넓어졌습니다. 1905년 9월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들이 모여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를 만들었고, 해마다 연초에 지역별 사경회를 연합부흥회로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1906년 1월부터 교파를 넘어선 연합부흥회가 전국에서 열렸습니다.
1906년 가을에는 미국 부흥운동 지도자 존스턴(H. A. Johnston)이 평양을 찾아와 웨일스와 인도에서 일어난 부흥 소식을 전했습니다. 평양의 선교사와 한국 교인들은 이때부터 몇 달 동안 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의 밤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연합사경회가 열렸습니다. 이 모임에서 당시 장로였던 길선주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고, 이것을 계기로 많은 신자들이 앞다투어 참회하고 자백했습니다.
길선주는 그해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장대현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을 다니는 부흥사가 되어 평양대부흥의 열기를 각지로 옮겼습니다. 선교사가 시작한 부흥이 한국인 지도자의 손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 평양대부흥이 남긴 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평양대부흥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사경회 속에서 일어났고, 철저한 회개가 뒤따랐으며, 처음엔 선교사가 이끌었지만 나중엔 한국인이 이끌었고, 교회에 도덕적 갱신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익숙한 새벽기도와 소리 내어 함께 기도하는 통성기도 같은 신앙 모습도 원산에서 평양으로 이어진 이 무렵의 부흥운동 속에서 나타났다고 평가됩니다.
이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본격적으로 조직을 갖추었고, 길선주를 비롯한 부흥운동 참여자들은 뒷날 3·1운동에도 함께했습니다. 한편 이 부흥이 교회를 현실 문제에서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어, 지금까지 여러 각도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 맺으며 — 회개에서 시작된 변화
평양대부흥의 이야기는 결국 "나부터 돌아보자"는 고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솔직한 고백이 공동체를 바꾸고, 서로 다른 교파를 한자리에 모았지요. 1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평양대부흥이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7년 대부흥운동」(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237), 「원산부흥운동」(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578), 「길선주」(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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