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 남양읍의 들판을 지나다 보면 멀리서 하늘을 향해 나란히 솟은 두 개의 탑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순례자들을 조용히 이끄는 그 탑 아래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께 공식 봉헌한 성지, 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기적의 발현지가 아니라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피가 스민 땅이라는 점에서 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은 남양성모성지 공식 누리집과 굿뉴스(가톨릭정보) 성지 자료, 가톨릭신문과 월간중앙 보도, 학술 논문 초록을 바탕으로 이곳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드리겠습니다.
■ 이름 없는 순교자들이 잠든 남양 고을
남양성모성지의 시작은 조선 후기 병인박해(1866~1873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지 누리집에 따르면 『병인치명사적』 등의 기록상 이 시기 남양에서 신앙을 지키다 포졸에게 붙잡힌 신자는 모두 아홉 명이었습니다. 그중 네 명은 수원과 서울 등 상급 관아로 옮겨졌고, 다섯 명이 남양 옥에 갇혔으며, 한 명은 풀려나고 네 명이 끝내 순교했다고 합니다.
기록으로 이름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 정 필립보,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김홍서 토마, 이렇게 네 분입니다. 굿뉴스 자료에 따르면 용인 덧옥돌에 살던 정 필립보는 1866년 11월 붙잡혀 이듬해 1867년 1월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하지만 성지는 이 네 분 말고도 더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보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무명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리고 있습니다.
학술지 『교회사학』에 실린 논문 「병인박해기 남양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 초록을 보면, 병인박해 때 남양에서 기록된 순교자 수는 수원·광주·죽산 같은 경기 남부의 다른 고을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당시 수령들이 박해에 미온적이었던 까닭으로 풀이되지요. 다만 1871년 신미양요 직후 반천주교 성향이 강한 수령이 부임하면서 단속이 거세져, 서해안 일대에서 상당수 신자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 "남편을 따라 함께 죽겠다" —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남양의 순교자 가운데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는 분들은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입니다. 굿뉴스 자료에 따르면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교리를 들었고, 훗날 회장으로 임명되어 신부가 공소를 찾을 때마다 교우들이 성사를 잘 받도록 준비시켰습니다.
부부는 신앙을 지키려고 수원 걸매, 신창 남방재, 홍주 신리로 거처를 옮겨 다녔습니다. 1868년 박해가 다시 거세지자 사위의 집에 피신해 있던 중, 남양에서 온 포졸들에게 붙잡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필립보는 아내와 기도를 하던 중이었고, 기도를 다 마친 뒤 스스로 나가 자신이 찾던 신자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포졸들은 남편만 데려가려 했지만, 박 마리아는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며 스스로 따라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남양 옥에서 한 달가량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교회 일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1868년 8월 3일 같은 날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둘은 동갑으로 당시 57세였습니다. 같은 날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38세)도 함께 순교했는데, 함께 붙잡혔던 그의 아내는 풀려난 뒤 남편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고 전해집니다. 성지 누리집은 김 필립보·박 마리아 부부가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되어 있다고 소개합니다.
■ 물에 빠졌던 한 신부의 서원에서 성모성지로
오랫동안 잊혔던 이 순교지는 1983년 말 박지환 요한 신부가 가꾸기 시작했고, 1984년 5월 남양 순교자 현양 대회가 열렸습니다. 큰 전환점은 1989년 8월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부임하면서 찾아왔습니다.
이상각 신부에게는 잊지 못할 날이 있었습니다. 성지 누리집과 월간중앙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1987년 5월 18일 무주 구천동 계곡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기적처럼 살아난 뒤, 같은 시각 어머니가 꿈을 꾸고 묵주기도를 바쳤다는 사실을 알고 남은 사제 생활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마침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무너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시기였습니다. 이 신부는 당시 수원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를 찾아가 남양 순교지를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는 성지로 봉헌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주교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1991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남양 순교지는 성모님께 봉헌되어 '로사리오의 성모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월간중앙은 이곳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공식 성모 성지라고 소개합니다.
■ 묵주기도 길을 따라 걷는 평화의 순례
남양성모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은 대개 묵주기도 길을 따라 걸으며 기도합니다. 성지 연혁에 따르면 2002년 5월 15단 묵주기도 길이 축성되었고, 2003년 5월에는 남양 성모상과 함께 빛의 신비를 더한 20단 묵주기도 길이 봉헌되었습니다. 2004년에는 과달루페 성모상, 2006년에는 자비로우신 예수님 상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지요.
세계 교회와의 인연도 깊어졌습니다. 2009년 3월 27일 로마 성 마리아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순례지'로 지정되어 전대사 특전을 받았고, 2015년 3월 25일에는 '평화의 모후 왕관의 열두 개의 별'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습니다. 2017년 10월 13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반도의 일치와 평화를 위해 축복한 성체현시제대가 설치되었고, 봉헌 30주년이던 2021년에는 교황과 함께 코로나19 종식을 위한 릴레이 묵주기도를 바친 전 세계 30개 성모성지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습니다.
■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빛의 대성당'
오랫동안 작은 조립식 경당에서 순례자를 맞던 성지는 봉헌 20주년인 2011년 대성당 건립을 계획했습니다. 신자들의 '100만 원 봉헌운동'이 시작되었고, 2011년 6월 7일 스위스 건축가 마리오 보타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첫 메일이 보내졌습니다. 보타는 그해 8월 성지를 처음 찾았고, 성지의 풍경과 분위기를 담기 위해 설계안을 열두 차례나 다듬었다고 합니다. 교보타워와 삼성미술관 리움으로도 잘 알려진 건축가입니다.
2017년 5월 13일 착공한 '통일기원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3만여 신자와 후원자의 정성이 모여 2020년 11월 첫 미사를 봉헌했고, 2023년 3월 25일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정면의 높이 50미터 두 탑은 하늘의 빛을 제대 위로 끌어내리고, 목재 루버로 마감한 천창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광을 공간 가득 담아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눈을 크게 뜬 독특한 십자고상이 순례자를 맞습니다.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가 90세가 넘은 나이에 조각한 작품으로, 못이 뒤에서 앞으로 박혀 죽음이 아닌 부활과 빛을 뜻한다고 합니다. 월간중앙은 반지가 재료비만 받고 재능기부로 작품을 남겼으며, 2024년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유작이라고 전합니다. 독일에서 제작해 옮겨 와 재조립하는 데만 3년 반 넘게 걸린 파이프 오르간, 문경 한지 454장에 옻칠과 밀랍을 입힌 1층 소성당의 한지 벽화도 이 대성당의 자랑입니다.
■ 종교를 넘어 쉼을 건네는 자리
오늘날 남양성모성지는 미사와 기도뿐 아니라 성음악 연주회가 열리는 문화 공간으로도 사랑받고 있습니다. 월간중앙은 연간 20만 명 이상이 찾는 곳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상각 신부는 가톨릭신문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와 성당 안에서 위로와 진정한 쉼을 얻는다면 그것이 종교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순교자들의 땅이 평화를 비는 기도의 자리가 되고, 다시 누구에게나 열린 쉼터가 되기까지 30여 년이 걸렸습니다. 가을빛이 깊어지는 요즘, 묵주기도 길을 천천히 걸으며 두 개의 탑 사이로 쏟아지는 빛을 바라본다면 신앙이 있든 없든 마음 한쪽이 조용히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남양성모성지 「환영 인사」 https://www.namyangmaria.org/welcome-message , 남양성모성지 「연혁」 https://www.namyangmaria.org/history , 남양성모성지 「순교지 남양」 https://www.namyangmaria.org/namyang-martyrdom-site ,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https://www.namyangmaria.org/church-of-the-shrine , 굿뉴스 가톨릭정보 성지 「남양의 순교자」 https://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PSIZE=20&ctxtOrgNum=2317&ctxtOtherID=116&ctxtOtherMenu=MODIFY&ctxtSubMenu=other&curpage=&menugubun=holyplace , 가톨릭신문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위로와 쉼' 선물하는 예술혼 깃든 공간」(2025.2.18)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50217500022 , 월간중앙 「예술이 이끄는 사색 있는 영혼의 안식처 꿈꿔」(2025.7.21) https://www.m-joongang.com/news/articleView.html?idxno=401397 , KCI 「병인박해기 남양의 천주교 박해와 순교자」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312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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