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선선해지는 10월이 오면, 성당 앞마당이나 성모상 앞에서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하나씩 넘기며 조용히 기도하는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천주교에서 10월은 '묵주기도 성월', 곧 성모님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손목이나 가방에 걸린 묵주를 한 번쯤 보셨을 텐데요. 오늘은 이 작은 구슬 꾸러미에 얽힌 오랜 역사와, 박해 시대 조선 신자들이 목숨처럼 지켰던 묵주 이야기를 확인된 기록을 따라 천천히 들려드리려 합니다.
■ 왜 하필 10월일까 — 1571년 레판토 해전과 10월 7일
10월이 묵주기도의 달이 된 데는 10월 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이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신문과 천주교 의정부교구 주보에 따르면,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로 세력을 넓혀 오자 성 비오 5세 교황(재위 1566~1572)은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힘을 모아 연합군을 꾸리도록 하고, 모든 신자에게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당부했습니다. 베네치아, 에스파냐, 교황령, 제노바 등의 군대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코린토만의 레판토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교황은 이 승리를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전구와 하느님의 은총 덕분이라 여겨 이날을 '승리의 성모 축일'로 정했고, 훗날 그레고리오 13세 교황 때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기억에서 출발했지만, 교회는 이 날을 지금까지 평화를 청하는 기도의 날로 지켜 오고 있습니다.
■ 1883년 레오 13세 교황의 회칙 「최고의 사도직무」
10월 한 달 전체를 묵주기도에 봉헌한 사람은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입니다. 교황은 1883년 9월 1일 회칙 「최고의 사도직무」(Supremi Apostolatus Officio)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 혁명 이후 이어진 사상적·정치적·사회적 혼란 속에 있었는데, 교황은 지난날 위기 때마다 묵주기도가 큰 힘이 되었던 일을 떠올리며 신자들에게 이 기도를 권했습니다.
회칙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본인은 진심으로 신자들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집에서나 가정에서 끊임없이 묵주기도를 바치기를 권고할 뿐 아니라, 금년도 10월 한 달이 거룩한 묵주기도의 천상 어머니께 봉헌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교황은 그해 10월 1일부터 11월 2일까지 모든 본당에서 묵주기도 다섯 단과 로레토 호칭기도를 함께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 뒤로 10월은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 개인과 가정의 성화를 지향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는 달로 자리 잡았습니다.
■ '장미 꽃다발'이라는 이름 — 묵주기도는 어떻게 생겨났나
묵주기도를 라틴어로는 '로사리오(Rosarium)'라고 부르는데, 그 뜻이 '장미 꽃다발'입니다. 기도 한 번 한 번을 꽃송이처럼 엮어 성모님께 바친다는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지요.
의정부교구 주보 「묵주 기도의 역사」에 따르면 그 뿌리는 아주 오래된 수도원 전통에 닿아 있습니다. 옛 수도자들은 시편 150편을 기도로 바쳤는데, 글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긴 시편 대신 주님의 기도를 150번 외웠습니다. 이때 횟수를 세려고 가죽 주머니에 작은 자갈을 넣거나 150개의 매듭을 엮은 끈을 썼는데, 이것이 오늘날 묵주의 기원으로 여겨집니다. 12세기 중엽에는 주님의 기도 대신 성모송을 외우는 형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성 도미니코(1170~1221)가 성모님께 묵주를 받아 이 기도를 전했다는 전승도 있지만, 주보는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없다고 솔직하게 덧붙입니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것은 도미니코회의 복자 알라노 드 뤼프(1428~1478) 때로, 그는 한 단마다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 열 번을 바치고 예수님 생애의 열다섯 신비를 환희·고통·영광의 신비로 정리했습니다. 이어 '묵주기도의 교황'이라 불리는 성 비오 5세가 1569년 9월 17일 칙서 「로마 교황들은 주로」(Consueverunt Romani Pontifices)를 반포해 묵주기도의 형식을 처음 공식적으로 선포했습니다.
■ 2002년, 묵주기도에 더해진 '빛의 신비'
400여 년 동안 이어진 묵주기도에 새로운 신비가 더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즉위 24주년이던 2002년 10월 16일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를 발표하고,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를 '묵주기도의 해'로 선포했습니다. 교황은 이 교서에서 즉위 2주 만에 "묵주기도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도"라고 고백했던 일을 다시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때 새로 생긴 것이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 다섯 단입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 가나의 혼인 잔치,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심, 거룩하게 변모하심,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심이 그 내용입니다. 요일도 새로 나뉘었습니다. 월요일과 토요일에는 환희의 신비,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고통의 신비, 수요일과 주일에는 영광의 신비, 그리고 목요일에는 빛의 신비를 바칩니다. 목요일은 성체성사가 세워진 날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한 단은 주님의 기도 한 번, 성모송 열 번, 영광송 한 번으로 이루어집니다.
■ '묵주신공'을 바치던 조선의 신자들
우리나라에도 묵주에 얽힌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영남대 국사학과 김정숙 교수가 대구대교구 월간 「빛」에 쓴 글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회의 첫 세례자 이승훈은 1784년 북경에서 교리서와 십자고상, 묵주 등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묵주신공' 또는 '매괴경'이라 부르며 열심히 바쳤습니다.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은 공무를 볼 때나 손님과 함께 있을 때에도 날마다 묵주신공을 거르지 않았고, 같은 해 공주에서 순교한 김광옥은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묵주는 곧 신자임을 드러내는 표시가 되었습니다. 기해박해 때 관청에 찾아가 신자임을 밝힌 여교우들은 포졸들이 잡아가려 하지 않자 묵주를 내보여 스스로 포도청으로 향했고, 반대로 포졸들은 붙잡은 신자가 묵주를 순순히 내놓으면 배교한 것으로 보고 풀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해 흩어지던 신자들은 묵주와 교회 서적을 땅에 묻고 길을 떠났는데, 그렇게 묻힌 묵주 가운데 일부가 지금도 가끔 발굴된다고 합니다.
19세기 중엽이 되자 조선 신자들은 묵주를 직접 만들 만큼 솜씨가 늘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1857년 마카오의 선교사에게 "조선 교우들도 묵주를 잘 만든다"며 묵주는 보내지 말라고 편지했고, 은사 신부에게는 묵주 만드는 집게와 구리철사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한 신자가 도망치다 떨어뜨린 조끼 속 묵주를 진주 목걸이인 줄 알고 22년이나 간직했던 여인이, 1888년 공소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는 교우들을 보고 교리를 배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의 묘를 옮길 때 나온 묵주는 십자고상의 얼굴이 다 닳아 없어져 있었다고 하니, 그 시절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 2026년 10월, 레오 14세 교황이 청한 평화의 묵주기도
올해 10월에도 묵주기도는 평화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티칸 뉴스에 따르면 레오 14세 교황은 9월 27일 프랑스 루르드 성모 성지에서 삼종기도를 바치며, 성모님께서 성녀 베르나데트에게 묵주를 들고 나타나셨던 그곳에서 "다가오는 10월 한 달 동안 전쟁이 그치고 분쟁 중인 민족들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특별한 지향으로" 묵주기도를 바쳐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구체적인 보속과 자비의 실천, 대화와 화해의 노력과 함께하기를 바랐습니다.
10월 1일에는 바티칸 정원의 루르드 동굴에서 어린이 700명을 포함한 1,300여 명이 교황과 함께 다섯 개 언어로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교황청 재단 '고통받는 교회 돕기'(ACN)가 20년 넘게 이어 온 '세계 평화를 위한 100만 어린이의 묵주기도'는 올해 처음으로 10월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로 넓혀 진행되었고, 교황은 10월 4일 삼종기도 때 다시 한번 어린이들의 모범을 따라 평화를 위해 기도하자고 청했습니다.
묵주기도는 화려한 말이나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는 기도입니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도 구슬 하나에 기도 한 번씩을 엮어 가면 됩니다. 박해 시대 조선의 신자들이 땅에 묻고 몸에 지니며 지켰던 그 묵주가, 오늘은 전쟁 없는 세상을 바라는 어린이들의 손에도 들려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이번 10월에는 누군가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을 하루 한 번 조용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장미 꽃다발을 엮듯 그 마음을 하나씩 모으다 보면, 우리 곁의 일상도 조금은 더 부드러워질지 모릅니다.
출처: 가톨릭신문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은?」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50926500064 , 가톨릭신문 「묵주기도 성월 특집 — 묵주기도를 사랑한 성인·교황들」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210090008596 , 천주교 의정부교구 주보 「묵주 기도 성월」·「묵주 기도의 역사」 http://ucatholic.or.kr/bbs/board.php?bo_table=jubo_contents&wr_id=782 , 레오 13세 회칙 Supremi Apostolatus Officio(1883) https://www.newadvent.org/library/docs_le13so.htm , 가톨릭신문 「묵주기도 '빛의 신비' 추가」(2002)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0210270025193 , 요한 바오로 2세 교서 Rosarium Virginis Mariae https://archive.wf-f.org/RosariumVirginisMariae.html , 월간 빛 김정숙 「묵주의 기적」 https://www.lightzine.co.kr/last.html?num=1441&p=v , 바티칸 뉴스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6-09/papa-viaggio-francia6.html ·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6-10/papa-rosario-pace-vaticano.html ·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6-10/papa-angelus-madonna.html , 미주중앙일보 「10월은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는 달」 https://www.koreadaily.com/article/5689976 , 위키백과 '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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