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 중턱에 오래된 산문이 열려 있습니다. 일주문에서 봉황문·해탈문을 지나 대적광전 뒤로 계단을 오르면, 수수한 목조 건물 안에 8만여 장의 경판이 고요히 숨 쉬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해인사(海印寺)는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한 화엄의 도량이자, 팔만대장경을 봉안한 법보사찰입니다. 오늘은 대백과와 국가유산 기록,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자료를 따라 그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 보려 합니다.
■ 802년, 해인삼매에서 이름이 오다
대백과 「가야산 해인사」는 신림의 제자 순응이 766년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귀국해 가야산에서 정진하다가,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했다고 적습니다. 성목태후가 전지 2,500결을 하사해 불사를 도왔고, 순응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정이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는 기록입니다. 최치원이 쓴 「해인사선안주원벽기」도 802년 10월 16일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절 이름 ‘해인’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에서 왔습니다. 대백과는 의상의 화엄 10찰 중 하나이며, 의상의 법손인 순응이 화엄 사상을 펴고자 이 이름을 골랐다고 설명합니다. 바다가 만물을 비추듯 맑은 마음에 법이 비친다는 뜻이지요. 훗날 고려 태조의 복전이었던 희랑이 이곳에서 화엄을 펼쳤고,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데 대한 보답으로 전지 500결을 헌납해 사우를 중건하게 했다고 대백과는 전합니다.
■ 몽골의 침입과 다시 새긴 팔만대장경
대백과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에 따르면,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은 고종 때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습니다. 이에 고려는 다시 경판을 새기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오늘날 해인사에 남은 재조대장경판, 곧 팔만대장경입니다.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하는 염원에서 판각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이규보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도 담겨 있습니다.
판각은 1237년(고종 24)에 시작해 1248년(고종 35) 대장 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기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고려대장경판이 모두 8만 1,258장의 목판으로 구성된다고 소개하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목판 대장경판이자 가장 오래되고 정확하며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평가받는다고 적습니다. 대백과는 산벗나무 등이 주재료이며, 세로 약 24㎝·가로 68~78㎝·두께 2.5~3㎝의 판에 양면으로 경문을 새기고 옻칠과 마구리를 더해 보존했다고 설명합니다. 교정은 개태사 승통 수기가 북송 관판·거란본·초조본을 대조해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 강화에서 가야산으로, 법보사찰이 되다
새긴 경판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대백과 「판전」 항목은 남해에서 판각된 뒤 강화산성 서문 밖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고, 1251년 전질 인출을 기념하는 의식이 거행되었으며, 1318년 강화 선원사로 옮겨졌다가 고려 말 외침의 혼란 속에서 1398년 해인사로 옮겨졌다고 정리합니다. 「가야산 해인사」는 강화 선원사에서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해인사로 봉안했다고 적고, 이로써 해인사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고 평합니다.
부처님(불)·가르침(법)·승가(승)를 기리는 삼보사찰 가운데, 해인사는 법을 모신 법보사찰로 불립니다. 통도사가 불보사찰, 송광사가 승보사찰인 것과 나란히, 팔만대장경을 지키는 해인사의 역할을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대백과는 해인사를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이자 선원·강원·율원을 갖춘 총림으로 소개합니다.
■ 장경판전, 바람과 습도를 읽는 나무 창고
경판을 지키는 건물이 바로 장경판전입니다. 대백과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 두 동이 남북으로 나란히 서 있다고 적습니다. 남쪽이 수다라장(修多羅藏), 북쪽이 법보전(法寶殿)이고, 그 사이 작은 동·서 사간판전이 해인사에서 간행한 목판을 보관합니다. 기와에 새겨진 ‘홍치원년(弘治元年)’ 각명으로 건립 연대를 1488년(성종 19)경으로 추정합니다.
국가유산청 「월간국가유산사랑」 기고는 1457년(세조 3) 신미·학조가 시찰한 뒤 왕명으로 판전을 확장했고, 1488년 인수대왕비·인혜대왕비의 발원으로 학조가 중수해 ‘보안당’이라 불렀다고 전합니다. 1622년 수다라장, 1624년 법보전 중수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살창의 크기를 앞뒤·위아래로 다르게 두어 산기슭에서 오는 습기와 바람을 자연스럽게 흐르게 한 설계는, 기계 없이 온·습도를 맞추려 한 옛사람의 지혜로 자주 소개됩니다. 대백과는 해인사 경내 건물 대부분이 근세에 다시 지어진 것과 달리, 장경판전만은 조선 전기의 모습을 간직한 현존 최고(最古)의 건물이라고 말합니다.
■ 1995년·2007년, 두 겹의 세계유산
장경판전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는 가야산 해인사의 장경판전이 1237~1248년에 새긴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15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경판 보존 기술의 뛰어난 적용을 보여 준다고 소개합니다. 이어 2007년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랐습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해인사가 900여 년간 대장경을 보완하기 위해 별도로 제작한 목각 경판 5,987장을 ‘제경판’이라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대백과는 사찰 자체가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면서도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 왔다고 강조합니다. 1695년·1696년·1743년·1763년·1780년·1817년 등 여러 차례 불이 났지만, 경판과 판전은 살아남았습니다. 나무에 새긴 법이 나무로 지은 집 안에서 수백 년을 견딘 셈입니다.
해인사성보박물관 안내에 따르면 장경판전은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일주문에서 대적광전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비로소 닿을 수 있습니다. 쉬이 가지 못하는 자리일수록 소중히 모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세계 유일의 목판 보관용 건축물이라는 평가도 같은 자료에 담겨 있습니다. 세조가 대장경 50부를 인출해 전국 사찰에 나누어 봉안케 한 사업과 맞물려 판전이 크게 다시 지어졌다는 흐름은, 대백과가 전하는 세조·성종 대의 중수 기록과도 맞물립니다.
■ 오늘, 가야산에서 듣는 법의 메아리
해인사는 802년 화엄의 이름에서 시작해, 몽골의 침입 앞에 다시 새긴 8만여 장의 경판, 강화에서 가야산으로 옮겨 온 봉안, 바람길을 읽는 장경판전, 그리고 세계문화유산과 세계기록유산이라는 두 겹의 인정까지 1,200년이 넘는 시간을 품어 왔습니다. 대백과가 정리한 대로 국보 대장경판·장경판전을 비롯한 성보가 겹겹이 쌓인 자리이면서도, 지금도 조계종 제12교구 본사·해인총림으로서 수행과 강학을 이어 가는 사찰입니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고, 산내 암자에는 희랑대·원당암·홍제암 등 오랜 수행의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합천 가야산 숲길을 걸을 때, 혹은 가까운 절집에서 경전 한 구절을 들을 때, 산 중턱에 남은 이 나무 창고와 8만 장의 글씨를 한 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소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이며, 관람과 템플스테이·성보박물관 일정은 절집에 미리 확인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바다처럼 맑은 마음에 법이 비친다는 ‘해인’의 뜻처럼, 오래된 믿음이 산과 바람과 함께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테니까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산 해인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2704 ,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2711 ,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2725 , 「판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0168 ,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 https://unesco.or.kr/고려대장경판-및-제경판/ ,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Haeinsa Temple Janggyeong Panjeon」 https://whc.unesco.org/en/list/737 , 국가유산청 「조선 대기과학 연구의 상징,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1008&nttId=73548&mn=NS_01_09_01 , 국가유산포털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13800520000&pageNo=1_1_2_0 , 해인사성보박물관 「장경판전」 https://haeinsamuseum.kr/relics/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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