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배론성지 — 황사영 백서 토굴과 한국 최초의 신학교, 최양업 신부가 잠든 제천 '배 밑바닥 골짜기' 이야기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배론성지는 충북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에 있는 천주교 원주교구 성지로, 1801년 황사영이 '백서'를 쓴 토굴, 1855년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당',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입니다.** 2001년 3월 2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배론'이라는 이름은 골짜기 모양이 배 밑바닥을 닮았다는 데서 나왔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제천의 산골짜기도 단풍으로 물듭니다. 그 골짜기 안쪽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오래된 교우촌이 있습니다. 오늘은 배론성지 공식 누리집과 국가유산청 자료, 위키백과에 정리된 내용을 바탕으로 이 '배 밑바닥 골짜기'에 깃든 세 가지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배 밑바닥을 닮은 골짜기, 옹기 굽던 교우촌

배론성지 누리집은 이곳을 "180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교우들이 모여 형성된 오래된 교우촌"이라고 소개합니다.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신자들은 옹기를 굽고 화전을 일구며 가난하게 살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국가유산청 설명에 따르면 배론은 1801년 신유박해 때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성지입니다. 성지 측은 이곳의 '세 가지 보물'로 황사영 백서 토굴, 성 요셉 신학당, 최양업 신부 묘를 꼽습니다. 한 골짜기 안에 박해기 교회의 편지와 학교와 무덤이 함께 남아 있는 셈입니다.

첫 번째 보물, 황사영 백서 토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천주교 지도자였던 황사영 알렉시오는 체포령을 피해 서울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는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수재였고,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였습니다. 성지 연혁에 따르면 그는 김한빈과 함께 배론으로 숨어들어 신자 김귀동의 집 뒤 토굴에 몸을 숨겼고, 그해 8월 이른바 '백서'를 썼습니다.

백서는 흰 비단에 쓴 편지라는 뜻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가로 62cm, 세로 40cm 비단에 아주 가는 붓으로 122행, 13,311자를 적었습니다. 박해의 경과와 순교자들의 이야기, 교회를 다시 세울 방안을 담아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던 편지였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전할 황심이 먼저 붙잡혔고,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면서 백서는 끝내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황사영은 그해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백서에는 서양의 배와 군대를 보내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 달라는 대목도 들어 있어, 오늘날까지 평가가 엇갈립니다. 박해받는 교회를 살리려던 절박한 기록이라는 시각과,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비판이 함께 있습니다. 원본은 1894년 의금부 창고에서 발견되어 뮈텔 주교에게 넘어갔고, 1925년 79위 시복식 때 교황 비오 11세에게 전해져 지금은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배론의 토굴은 복원되어 있고, 그 안에 실물 크기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보물, 한국 최초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당

황사영이 떠나고 반세기쯤 지난 1843년, 장주기 요셉이 가족을 데리고 배론으로 옮겨 왔습니다. 성지 연혁에 따르면 1855년 2월 4일 이전에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가 장주기 요셉의 집에 한국 최초의 신학교를 열었습니다. 장주기 회장이 자기 집을 신학교로 내어 준 것입니다.

1856년부터는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을, 1862년부터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를 맡았습니다. 1859년 10월 베르뇌 주교가 이 학교에 '성 요셉 신학당'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수업은 라틴어과와 신학과로 나뉘었고, 신학과에서는 수사학, 철학, 신학을 가르쳤습니다. 두 신부는 학생을 가르치면서 교리서를 번역하고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도 만들었습니다. 성지 측은 이 학교가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이자 조선 최초의 근대 신학 교육 기관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이 작은 학교를 덮쳤습니다. 그해 3월 포졸들이 신학교를 급습해 두 신부를 붙잡았고, 두 사람은 3월 11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장주기 요셉 회장은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3월 30일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는데, 그때 흰 무지개 다섯 줄기가 하늘로 솟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세 번째 보물,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묘

배론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로 사제가 된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가 잠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어머니는 복자 이성례 마리아입니다. 그는 1836년 12월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에서 공부했고,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귀국한 뒤 그는 11년 6개월 동안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다섯 도에 걸친 산골 교우촌을 걸어서 찾아다녔습니다. 성지 자료에 따르면 그가 맡은 신자는 6천여 명, 공소는 127곳이었습니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순방을 마치고 서울로 오던 길에 과로로 문경에서 숨졌고, 그해 11월 베르뇌 주교가 당시 신학교가 있던 배론에 그를 묻었습니다. 베르뇌 주교는 추도사에서 그를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 같은 열심"을 지닌 사제로 기억했습니다.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평생 걸으며 땀으로 신앙을 지켰다는 뜻에서 '땀의 순교자'라고 불리며, 성지는 그를 '가경자'라는 칭호로 부릅니다.

오늘의 배론성지, 기도하며 걷는 골짜기

박해가 끝난 뒤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었고, 1945년 9월 27일에는 신자 3, 4백 명이 모인 가운데 최양업 신부의 묘비 제막식이 열렸습니다. 1969년 원주교구가 이곳을 맡게 되었고, 1979년 9월 23일부터는 해마다 배론성지에서 순교자 현양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990년에는 관상 봉쇄 수도원이 들어섰고, 2011년 지학순 주교 기념관이 문을 열었으며, 2020년 8월 15일에는 피정과 기도를 위한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가 봉헌되었습니다.

옹기 굽던 골짜기에서 쓰인 비단 편지, 남의 집 방 한 칸에서 시작된 신학교, 그리고 길 위에서 생을 마친 사제의 무덤까지. 배론의 이야기는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어려운 시절에도 서로를 지키며 신앙을 이어 간 사람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이번 가을 제천을 지나신다면 배 밑바닥처럼 오목한 이 골짜기에 잠시 들러 조용히 걸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방문 문의는 배론성지 대표번호 043-651-4527로 하시면 됩니다.

출처: 배론성지 공식 누리집(천주교 원주교구) 「연혁」 https://www.baeron.or.kr/shrine/history , 「성 요셉 신학교」 https://baeron.or.kr/treasure/seminary , 「최양업 신부님 묘소」 https://www.baeron.or.kr/treasure/grave , 「영성 및 로고소개」 https://www.baeron.or.kr/shrine/bi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천 배론성지」, 위키백과(한국어) 「배론성지」 https://ko.wikipedia.org/wiki/배론성지 , 「황사영 백서」 https://ko.wikipedia.org/wiki/황사영_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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