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 종로 거리에 연등이 하나둘 켜지면, 도시의 소음도 잠시 부드러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부처님오신날(음력 4월 초파일)을 앞두고 전국 사찰과 거리마다 등을 밝히고, 사람들이 그 등을 들고 행렬을 이루는 의식이 바로 연등회(燃燈會)입니다. 본디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불교 의식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국적·인종·종교·장애의 경계를 넘어 누구나 함께 참여하는 봄철 축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2012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고, 202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른 그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 보려 합니다.
■ 등불을 밝히는 뜻 — 무명을 깨고 지혜를 비추다
불교에서 등공양(燈供養)은 향공양과 함께 중요하게 여겨져 왔습니다. 불전에 등을 밝힌다는 것은 단지 주변을 밝히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맑고 바르게 하여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고 귀의하려는 뜻을 담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서 등공양의 공덕이 무량하다고 설해졌음을 소개하며, 『삼국유사』 감통편에도 불등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고 밝힙니다. 등을 밝히는 것이 연등이고, 그 등을 보며 마음을 밝히는 일을 간등(看燈)·관등(觀燈)이라고 부릅니다. 어둠을 몰아내고 밝음을 가져오는 상징이, 오늘날 종로를 물들이는 연꽃등·용머리등·물고기등의 빛에도 그대로 이어져 있습니다.
■ 신라에서 고려까지 — 국가 의례로 피어난 연등
연등의 뿌리는 멀리 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정월 15일 관등 행사가 매년 있었다고 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551년(진흥왕 12) 팔관회 개설과 함께 국가적 행사로 열리게 되었다고 정리합니다. 고대의 풍년기원제·용신 신앙과 불교 등공양이 어우러지며, 호국 신앙의 대본산인 황룡사에서 종합적 가무제로 행해졌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연등회는 태조의 『훈요십조』에 힘입어 거국적 의례로 성대하게 이어졌습니다. 초기에는 정월 15일에 열리다가 성종 때 잠시 중단된 뒤, 현종 대에 2월 15일로 복설되어 고려 멸망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왕은 봉은사로 행향하고, 대회와 소회로 의식을 나누었으며, 연등날을 공휴일로 두고 연등도감까지 두었을 만큼 국가가 직접 주관한 큰 잔치였습니다. 우리역사넷은 연등회가 팔관회와 함께 계층을 넘어 백성이 함께 참여한 문화축제였다는 점을 특히 강조합니다. 한편 석가탄신일인 사월초파일 연등도 고려 중후반부터 기록에 나타나며, 의종 때 백선연이 4월 8일에 점등했다는 것이 그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공민왕이 직접 초파일 연등을 열면서 서민층에까지 퍼졌고, 어린이들이 한 달 전부터 기를 들고 성중을 다니며 쌀과 베를 구하는 호기(呼旗) 풍속도 이때 본격화되었습니다.
■ 조선을 지나 민간 세시풍속으로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적 성격이 강한 국행 연등회는 우선적 철폐 대상이 되었습니다. 태종 15년(1415)에 초파일 연등이 중지되었고, 정월 연등에 관한 기록도 1416년 이후 실록에서 사라집니다. 대신 수륙재가 봄·가을에 열리며 호국 신앙의 맥을 이어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월초파일 연등은 여러 굴곡을 겪으면서도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꾸준히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부처님오신날 연등회의 직접적인 뿌리가 되었습니다.
■ 연등법회·행렬·회향 — 오늘의 연등회가 움직이는 방식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지금의 연등회는 연등법회, 연등행렬, 회향(廻向)으로 구성됩니다. 아기 부처님을 모셔 목욕시키는 관불의식으로 시작해, 참가자들이 대나무·한지로 만든 전통 연등을 들고 거리를 행진합니다. 행렬이 끝난 뒤에는 회향 한마당에서 화합의 절정을 이룹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등을 밝혀 자신과 가족, 이웃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본디 종교 의식이었던 행사가, 이제는 인종·세대·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국가적 봄 축제로 열린 셈입니다. 연등 만들기 기술과 지식은 사찰과 지역 불교 공동체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며, 연등회보존위원회는 일반인 교육과 전문 전승 프로그램을 통해 그 맥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조계사·종로·흥인지문 일대에서 연등행렬과 전통문화마당이 열립니다. 2024년에는 5월 10~12일, 2025년(불기 2569년)에는 4월 26~27일을 중심으로 어울림마당·연등행렬·대동한마당·연등놀이 등이 이어졌습니다. 행렬은 흔히 흥인지문에서 출발해 종각을 지나 조계사로 향하며, 수만 개의 행렬등과 장엄등이 도심 밤길을 환하게 밝힙니다. 가로연등·전통등전시회가 청계천·광화문·조계사 우정공원 등에 미리 걸려, 봄 서울을 찾는 이들에게도 친숙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 유네스코가 주목한 포용과 화합
2012년 4월 6일 연등회는 국가무형문화재(현재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2020년 12월 16일(파리 현지시간) 제15차 유네스코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습니다. 외교부 보도에 따르면, 위원회는 연등회가 시대를 지나며 바뀌어 온 포용성으로 국적·인종·종교·장애의 경계를 넘어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 주는 점, 사회적 경계를 잠시 허물고 기쁨을 나누며 위기를 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등재 신청서 자체도 무형유산의 가시성과 인식을 높인 모범 사례로 꼽혔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당시 기준 21건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유네스코가 본 것은 화려한 등이 아니라, 등이 사람들을 모으는 힘이었습니다. 낯선 이들이 같은 보폭으로 걷고, 눈빛을 나누고, 함께 노래하는 그 순간이, 연등회가 세계유산이 된 이유에 가깝습니다.
■ 봄밤에 켜 두는 작은 등 하나
연등회는 신라의 황룡사에서, 고려 개경의 봉은사에서, 조선의 초파일 골목에서, 그리고 오늘의 종로 거리까지 천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등이 바뀌고 길이 바뀌어도, “어둠을 밝히고 마음을 밝힌다”는 뜻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운 사찰의 연등 만들기 체험에 참여해 보시거나, 종로·조계사 일대의 가로연등을 천천히 걸어 보시면 어떨까요. 손안에 든 작은 연꽃등이, 오래전부터 이 땅이 품어 온 기원의 빛이 되어 줄지도 모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등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751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연등회'(인류무형문화유산) https://www.heritage.go.kr/heri/html/HtmlPage.do?pageNo=4_3_2_0&pg=%2Funesco%2FCulHeritage%2FCulHeritage_21.jsp , 외교부 보도자료 '「연등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2020.12.16) https://www.mofa.go.kr/www/brd/m_4080/view.do?seq=370808 , 우리역사넷 '고려의 연등회'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365 , 현대불교신문 '미리보는 불기 2569년 연등회'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18809 , 금강신문 '2024 연등회 5월 10~12일 종로일원서 펼쳐진다' https://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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