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산신각(山神閣)은 절 안에 산의 신령인 산신(山神)을 모신 작은 전각이고, 산신각 기도는 주로 자식과 재물, 집안의 평안을 비는 기도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없는 우리 토착신이었는데, 불교가 재래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절의 수호신이 되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산신각이 차차 생겨났습니다. 불교 본연의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殿)'이 아니라 반드시 '각(閣)'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지금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산신각 안에는 보통 흰 수염의 노인이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도(山神圖)가 걸려 있습니다.
등산을 하다 절 마당 뒤편, 대웅전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있는 한 칸짜리 작은 건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들여다보면 호랑이에 기대앉은 할아버지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앞에서 조용히 절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속에서 말하는 '산신령', 마을 뒷산의 '산제당', 무당이 모시는 산신 할아버지와 절의 산신각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산신각」·「산신신앙」·「산신당」·「산신제」·「산신도」·「평창 동보현 산신각」·「덕릉마을 산신각」 항목을 바탕으로 산신각의 뜻과 유래, 산신도에 담긴 상징, 산신각 기도와 마을 산신제의 모습까지 차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산신각 뜻 — 절 안에 있지만 불교 본래의 신은 아닌 이유
산신각은 사찰에서 산신을 봉안하는 불교 건축물로, 한국 사원에만 있는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상국 집필)은 산신각을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증거"라고 설명합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었지만, 불교의 재래 신앙에 대한 포용력 덕분에 먼저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고, 후대에는 불교 안에서 본래의 성격을 되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산신신앙의 근거를 불교 경전(불전) 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산신은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와 중기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산신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했고, 백과사전은 이를 하근기(下根機), 곧 불교의 깊은 가르침보다 현실의 복을 먼저 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세워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름에도 구분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모신 건물은 대웅전·극락전처럼 '전(殿)'이라 부르지만, 산신을 모신 건물은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 부릅니다. 오늘날 산신은 절을 지키는 가람수호신이면서,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산신각·삼성각·칠성각, 무엇이 다를까
절에 따라 산신각 대신 '삼성각(三聖閣)'이나 '칠성각'이라는 현판을 단 곳도 많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신도」 항목에 따르면 산신도는 주로 사찰 안 삼성각에 치성광여래도(칠성)·독성도(나반존자)와 함께 봉안되거나, 산신각에 단독으로 봉안되었습니다. 즉 삼성각은 산신·칠성·독성 세 분을 한 건물에 함께 모신 곳이고, 산신각은 산신만 모신 곳입니다.
「산신당」 항목(김태곤 집필)도 같은 점을 짚습니다. 사찰 안의 산신당은 민간 신앙이 불교와 융화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불교 포교의 한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민간에서 신앙이 두터운 칠성도 함께 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칭이 산신당·산신각이 될 수도 있고 칠성각이 될 수도 있어 꼭 일정하지는 않습니다. 사찰 안의 산신각은 대개 한 칸 내외의 조그마한 목조 기와집이며, 큰 산에 있는 산신각도 대개 비슷한 규모입니다.
산신은 누구인가 — 단군 신화에서 산신령 할아버지까지
산신신앙은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신신앙」(김열규 집필)은 산악신앙을 천지·천체 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습니다. 그 뿌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후한서』 동이전 예(濊)조에는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 기록 뒷부분에 "범에게 제사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는 대목이 보입니다. 백과사전은 후세에 범(호랑이)을 산신과 동일시한 원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건국 신화에도 산신이 등장합니다. 단군신화에서 산은 환웅이 강림하는 자리이자 신이 머무는 곳이며, 단군은 죽음 뒤 산에 들어가 산신이 된 것으로 표현됩니다. 신라 탈해왕은 토함산신으로 신봉되었고, 가락국의 시조모로 전해지는 정현모주, 신라 혁거세와 관련된 선도산성모처럼 여성 산신도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신이 나타나 춤추는 것을 혼자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나라에서도 산을 받들었습니다. 신라는 나력·골화·혈례의 삼산에 대사(大祀)를, 토함산·지리산·계룡산·태백산·부악의 오악에 중사(中祀)를 올렸고, 고려는 태조의 유훈에 따라 오악과 명산을 받들었습니다. 조선은 태조 때 이미 동 금강산, 남 지리산, 중 삼각산, 서 묘향산, 북 오대산의 5악과 5진을 제사 지내는 산으로 지정했습니다.
민간에서 산신은 산신령·신령으로 불리며, 노인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호랑이 자체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호랑이를 산신이 타고 다니는 말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산신이 흰 수염의 선풍도골(仙風道骨) 노인으로 그려질 때는 신선 사상과도 이어집니다. 또 지역을 지키는 산신은 서낭신과 겹쳐 마을신으로 섬겨지면서 서낭굿·별신굿·당산굿 같은 마을굿의 주신이 되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마을 제사인 동신제를 아예 산신제로 부를 정도였습니다. 백과사전은 산신이 산신각이라는 형태로 불교에 편입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무속에서 말하는 산신령, 절의 산신각, 마을의 산제당이 모두 같은 산악숭배에서 갈라져 나온 셈입니다.
산신도 읽는 법 — 호랑이, 부채, 불로초에 담긴 뜻
산신각 안의 그림, 산신도는 산신이 불교에 편입되면서 만들어진 불교 회화입니다. 「산신도」 항목에 따르면 산신은 산왕(山王)·산령(山靈)·산군(山君)이라고도 불렸고, 1573년 의식집 『법계성범수륙승회수재의궤』를 비롯한 불교 문헌에 16세기부터 꾸준히 산신 기록이 보입니다. 다만 현전하는 작품으로 보면 산신도는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제작 연대가 확실한 이른 작품으로 함양 용추사 산신도(1788), 영천 은해사 박물관 소장 산신도(1817), 의성 고운사 산신도(1820), 합천 해인사 산신도(1831)가 있으며, 알려진 산신도만 150점이 넘고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그려졌습니다.
그림의 기본 구도는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수염이 길고 백발인 인자한 노인이 호랑이에 기대앉은 모습입니다. 시자(侍者)들이 차를 달이거나 공양물을 들고 곁에 서 있기도 하고, 드물게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도 있습니다. 여성형, 호랑이 없는 제왕형, 투구를 쓴 장군형, 학자형, 승려형, 남녀가 함께 앉은 부부형 산신도도 종종 만들어졌습니다.
호랑이는 산신의 사자이거나 화신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전통 산신도의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면서도 고양이처럼 귀엽고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려져 민화 까치호랑이를 떠올리게 하는데, 20세기 이후에는 일본 호랑이 그림의 영향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포효하는 무서운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산신은 주로 붉은 옷을 입고, 손에는 깃털부채·파초선·불로초·불자(拂子)를 들며, 시자들은 복숭아·유자·석류·모란꽃처럼 길상의 의미를 지닌 공양물을 듭니다. 배경에는 소나무·괴석·폭포·불로초가 그려지고, 후대로 갈수록 사슴·학·대나무 같은 십장생 모티프가 더해졌습니다.
산신각 기도 — 무엇을 빌고, 왜 그렇게 많이 찾을까
백과사전은 현재 산신각에서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산신 기도가 많이 행해지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산신도」 항목 역시 산신이 자식을 점지해 주고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이 신앙했고, 그 때문에 조선 후기 이후 대부분의 사찰에 산신상과 산신도가 모셔졌다고 설명합니다. 부처님께 깨달음을 구하는 기도와 달리, 산신각 기도는 아이, 살림, 건강, 집안의 무탈처럼 손에 잡히는 바람을 비는 자리였던 셈입니다.
산신 기도는 절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산신제」 항목은 마을의 산신제를 산치성(山致誠)이라고도 부른다고 적고 있고, 덕릉마을 산신각처럼 무당을 불러 굿을 올리던 산신당도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를 올리는 구체적인 절차나 시기는 절과 지역, 기도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므로, 사찰 산신각에서 기도를 올리고 싶다면 해당 절의 종무소에 먼저 문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마을의 산신제 — 생기복덕 맞는 제관, 밤 10시의 제사
절 밖 마을에서는 산신제로 산신을 모셔 왔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신제」(임동권 집필)에 따르면 산신제는 산제·산제사·산치성이라고도 하며, 따로 지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마을 제사인 동제의 일환으로 행해집니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조에 헌강왕이 오악신에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산신신앙의 시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마을 뒷산에 산신단·산신당·산제당을 마련해 산신을 모시며, 시기는 마을마다 다르지만 새해 초사흘부터 대보름(상원) 사이에 지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경비는 마을 공동으로 추렴하고, 제관·축관·화주는 부정이 없고 생기복덕(생기일과 복덕일)이 맞는 사람으로 뽑습니다. 뽑힌 사람은 일정 기간 목욕재계하고 금기를 지키며, 마을 사람들도 부정한 일과 살생을 삼갑니다. 산신제는 보통 밤 10시경에 시작해 새벽 1시경까지 진행하고, 끝나면 징을 쳐서 알립니다. 다음날 제사 음식을 나눠 음복하고 농악과 함께 놀이를 벌이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산신당이라는 이름은 통계적으로 경기도·충청도·강원도 순으로 많이 쓰이고, 영남·호남에서는 같은 마을 제당을 당산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으며, 제주도에서는 마을 수호신당을 본향당이라 부르고 산신당이라는 이름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마을의 산신당은 신목(神木)만 있는 경우가 많고, 당집이 생기면 그 안에 위패나 범을 곁들인 노인상의 산신도를 모십니다.
실제로 남아 있는 사례도 있습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삼각산 보현봉의 평창 동보현 산신각은 1973년 서울시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정면·측면 1칸의 목조 맞배지붕 건물 안에 호랑이를 탄 노인상(기호노인상) 산신도가 걸려 있습니다. 원래 근처에 여산신각과 부군당 신목이 함께 있었으나 여산신각은 1974년경 소실되었고, 매년 음력 3월 1일 마을 노인들이 추렴해 유교식 제사를 지내 왔습니다. 백과사전은 여산신각이 산신을 여신으로 여긴 오래된 관념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합니다. 경기도 남양주 덕릉마을 산신각(1996년 경기도 민속문화유산 지정)은 1888년 현판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광복 전후까지는 음력 1월과 10월 초하루에 무당을 불러 큰 대동굿을 올렸으나 지금은 생기복덕 맞는 깨끗한 사람을 화주로 뽑아 밤에 유교식 제사를 지냅니다. 백과사전은 이곳을 산신신앙이 무속·불교·유교와 융화한 마을신앙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자료로 꼽습니다.
산신각은 절 안의 작은 건물이지만, 그 안에는 단군 신화의 산, 『후한서』가 기록한 호랑이 제사, 신라의 오악, 마을의 산제당, 무당의 산기도가 모두 겹쳐 있습니다. 다음에 절에 가면 대웅전 뒤편의 산신각에 들러 호랑이의 표정과 산신이 든 부채를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한 장의 그림 안에 우리 땅의 오래된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신각」(박상국)·「산신신앙」(김열규)·「산신당」(김태곤)·「산신제」(임동권)·「산신도」·「평창 동보현 산신각」(장주근)·「덕릉마을 산신각」(장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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