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으로 기억되는 손양원 목사. 여수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살았고,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용서해 양자로 삼았으며, 6·25전쟁 중에도 환자를 떠나지 않다 순교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그를 여수·순천 사건 때 원수를 양아들로 삼은 기독교 목회자이자 순교자로 기록합니다. 오늘은 그 자료들을 따라, 함안에서 여수까지 이어진 산돌 손양원의 발자취를 차분히 살펴보려 합니다.
■ 함안에서 난 산돌, 신앙으로 자란 소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손양원의 호는 산돌입니다. 1902년 7월 7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구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릴 적 이름은 손연준이었습니다. 1909년 아버지와 함께 기독교에 입문해 독실한 신앙 가정에서 자랐고, 1924년 정양순과 결혼해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습니다.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그가 칠원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동방요배를 거부해 퇴학 위기를 겪었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복교해 1919년 졸업한 뒤 맹호은(F. J. L. Macra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적습니다. 아버지가 3·1운동에 가담해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서울 중동학교 학업을 중단했고, 이후 일본 스가모 중학교 야간부를 거쳐 경남성경학원에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같은 학원에서 훗날 순교자가 된 주기철 목사와 스승·제자의 연을 맺었다는 점도 대백과사전이 밝히고 있습니다.
■ 애양원교회, 한센병 환자 곁에 앉은 목회
손양원은 부산 감만동 나병원 안의 상애원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한 뒤,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여수 한센병 요양원 애양원(愛養院) 교회에서 시무했습니다. 대백과사전은 그가 1938년부터 줄곧 애양원교회에서 일했다고 정리합니다.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외부인이 흰 장갑을 끼고 방문하던 관례와 달리, 그가 장갑 없이 환자와 악수하고 함께 식사했다고 전합니다. 부임과 함께 자신은 연준에서 양원으로, 부인은 쾌조에서 양순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나환자들과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결심이 담긴 일이었다고 합니다.
애양원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피하려 하던 병실에도 들어가 손을 잡고 기도했다는 증언이 교회 자료에 남아 있습니다. 한센병으로 소외된 이웃을 ‘나’와 같은 형제로 여기는 목회, 그것이 손양원 목회 인생의 중심축이었습니다.
■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르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손양원은 이를 우상숭배로 보고 거부했습니다. 대백과사전은 1940년 신사참배 거부로 체포되어 해방 때까지 수감되었다가 출옥했고, 다시 애양원교회로 돌아와 194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적습니다.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1940년 9월 25일 연행, 광주 형무소에서의 징역, 전향을 거부해 보호관찰·무기 구금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더 자세히 전합니다. 설교 자리에서도 신사참배가 십계명의 첫째·둘째 계명을 어기는 일이라며 단호히 반대했다고 합니다.
해방 뒤에도 그는 원칙을 지켰습니다. 대백과사전은 1949년 국기배례가 우상숭배에 해당한다며 반대 운동을 펼쳤다고 기록합니다. 권력과 관습이 요구하는 절과,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양심 사이에서 그는 줄곧 후자를 택했습니다.
■ 여순사건, 두 아들을 잃고도 원수를 양자로 삼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사건(여순사건) 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좌익 학생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대백과사전은 살해에 가담했던 안재선이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 손양원이 구명 운동을 펴 즉결 처분 직전의 안재선을 구해 양아들로 삼았다고 적습니다. 사후에 붙은 별명이 바로 ‘사랑의 원자탄’입니다.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그가 장례식에서 ‘아홉 가지 감사’를 드렸다는 일화와, 경찰이 담배를 떨어뜨리며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십니다”라고 했다는 전언을 함께 전합니다. 인간적으로는 원수보다 미웠을 범인을, 마태복음이 말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아들로 받아들인 결단이었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여순사건의 이념·정치적 성격과 안재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지만, 손양원이 구명과 양자 입양을 실천했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공신력 있는 기록에 공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 환자를 떠나지 못한 채 맞이한 순교
6·25전쟁이 일어나자 주변에서 피난을 권했지만, 손양원은 한센병 환자 곁을 지키기 위해 거절했습니다. 대백과사전은 1950년 9월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어 28일 밤 순천으로 끌려가던 중 미평에서 총살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9월 13일 애양원에서 연행된 뒤, 서울 수복의 날인 9월 28일 밤 여수 근처 미평 과수원에서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향년 마흔아홉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강당에서 설교하다 죽거나, 길에서 전도하다 죽거나, 고요한 곳에서 기도하다 죽을지언정, 약사발 들고 앓다 죽을까 두렵다”는 말을 남겼다고 함안문화대전은 적습니다. 그 말대로, 그는 환자 곁을 지키다 신앙의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 기념관이 지키는 사랑과 화해의 기억
손양원의 일대기 『사랑의 원자탄』은 영어·독일어 등으로 번역되고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사단법인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민족지도자손양원목사기념사업회 등이 조직되었고, 1993년 여수 애양원 인근에 손양원목사순교기념관이, 2015년에는 함안군 생가 터에 손양원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디지털함안문화대전은 1949년 3월 김구가 그를 만나 「답설야중거」 시를 건넸다는 일화도 소개합니다. 눈 내린 들판을 걸을 때 발걸음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그 시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된 그의 삶과 잘 어울립니다.
오늘 우리가 손양원을 기억한다면, 극적인 이야기만 소비하기보다 그 선택이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는지를 함께 헤아리면 좋겠습니다. 한센병 환자 옆자리, 신사참배 거부의 옥중, 원수를 아들로 삼은 결단, 피난을 거절한 최후. 그 네 장면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한 가지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증명된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원수와 소외된 이웃에게까지 닿을 때 비로소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손양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0532 , 디지털함안문화대전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자, 손양원 목사」 https://haman.grandculture.net/haman/toc/GC0620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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