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서서평 선교사 — 동전 일곱 전과 담요 반 조각을 남긴 광주 양림동의 '조선의 작은 예수', 섬김으로 산 간호 선교사 이야기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광주 양림동 언덕에 잠든 한 간호 선교사의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었다는 문장입니다. 그 주인공은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간호사가 되고, 서른두 살에 조선 땅을 밟아 스물두 해를 이곳 사람들과 함께 살다 간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우리 이름으로는 서서평(徐舒平)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 남긴 것은 동전 일곱 전과 강냉이가루 두 홉, 그리고 걸인에게 주고 남은 담요 반 조각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품었던 서서평 선교사의 이야기를 천천히 나눠 보려 합니다.

■ 버림받은 아이, 간호사가 되다

서서평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헤센주 비스바덴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는 어린 딸을 할머니에게 맡긴 채 홀로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소녀는 혼자 뉴욕으로 건너가 어머니를 찾았지요. 디지털광주문화대전에 따르면 그는 1901년 뉴욕주 성 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해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뉴욕의 병원에서 야간 간호사로 일하면서 낮에는 성경교사훈련학교(현 뉴욕신학대학)에서 공부했고, 동료 간호사를 통해 개신교를 만나 신앙을 바꾸었습니다. 이 일로 어머니와의 관계마저 끊어졌다고 하니, 그의 젊은 날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민자 수용소와 요양소 등에서 가난한 이들을 돌보며 자신의 길을 찾아갔습니다.

■ 1912년, 서른두 살에 조선으로

조선의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하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 지원했고, 1912년 간호 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지 2년, 굶주림과 병으로 길가에 쓰러지는 사람이 많던 때였습니다. 그는 광주 제중원, 군산 구암예수병원, 서울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조선인 간호사들을 가르치고 이끌었습니다. 디지털광주문화대전은 1919년 3·1운동 때 다친 조선인들을 치료하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도운 일이 문제가 되어 서울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지자 광주 제중원으로 내려왔다고 전합니다. 이후 광주는 그가 평생을 바친 삶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 무명옷에 고무신, 보리밥과 된장국

서서평이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까닭은 그가 '조선인처럼' 산 것이 아니라 '조선인으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명 베옷과 고무신 차림으로 다니고,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었으며, 일제가 우리말을 억누르던 시절에도 한국어로 말하고 한글로 글을 썼습니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서서평'이라 지었습니다. 평생 혼자 살았지만 버려진 아이 열세 명을 딸로, 한센병 환자의 아들 한 명을 아들로 들여 모두 열네 명을 키웠고, 갈 곳 없는 과부들과 한집에서 지냈습니다. 제중원에서는 동갑내기였던 윌슨(우일선) 원장, 최흥종 목사와 함께 한센병 환자와 걸인, 무의탁 병자들을 돌보았습니다. 덮던 담요마저 반으로 나눠 걸인에게 내어 줄 만큼, 그는 늘 가장 춥고 배고픈 이웃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 이일학교와 조선간호부회, 여성의 길을 열다

그는 배움의 기회가 없던 여성들에게 특히 마음을 썼습니다. 1922년 가난해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여성들을 모아 전도부인 양성 학교를 열었고, 1926년 미국 친구 로이스 닐(Lois Neel)의 후원금으로 양림동산에 붉은 벽돌 3층 교사를 지은 뒤 그 이름을 따 '이일(李一)학교'라 불렀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로 꼽히는 이 학교는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문을 닫았지만, 해방 후 다시 열렸고 1961년 전주의 한일여자신학대학과 합쳐져 오늘의 한일장신대학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도록 수를 놓은 손수건과 책상보를 미국에 보내 팔기도 했지요. 1923년에는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를 세워 초대 회장을 맡고 10여 년간 이끌며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을 위해 힘썼고, 『간호 교과서』, 『실용 간호학』, 『간이 위생법』 같은 책을 한글로 펴냈습니다. 여성 교인들의 모임인 부인조력회(현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한 것도 그였습니다.

■ 동전 일곱 전과 담요 반 조각, 광주 첫 시민사회장

가진 것을 모두 나누던 그는 정작 자신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영양실조와 병으로 몸이 무너진 끝에 1934년 6월 26일 광주에서 쉰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던 자신의 병을 연구하는 데 쓰도록 시신을 의학 연구용으로 내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남은 유산은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 반쪽 담요가 전부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졌고, 1천여 명이 상여를 따르며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목 놓아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그를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고, 김모임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그를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했습니다.

■ 양림동 선교사 묘원에서 다시 만나는 이름

서서평은 광주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학교 뒤편 양림동산의 선교사 묘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 묘원은 1909년 순교한 오웬(오기원) 선교사를 묻으면서 시작되었고, 유진 벨(배유지) 선교사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와 가족 23명이 이곳에 묻혔습니다. 2010년에는 서울 양화진과 전주에 안장된 선교사들의 묘비를 같은 모양으로 재현해 세워 지금은 45기의 묘비가 언덕을 지키고 있습니다. 2017년 4월 26일에는 배우 하정우가 내레이션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해 많은 이들에게 그의 삶을 다시 알렸고, 광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서서평길'도 생겼습니다. 양림동 골목을 걷다 묘원 앞줄 가운데 그의 묘비 앞에 서면,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짧은 문장이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질문이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 우리 곁에서 가장 추운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요.

출처: 디지털광주문화대전 「서서평」 https://gwangju.grandculture.net/gwangju/toc/GC60001999 , 위키백과 「서서평」 https://ko.wikipedia.org/wiki/서서평 , 광주문화예술인문스토리플랫폼(한국학중앙연구원) 「서서평」 https://dh.aks.ac.kr/~gwangju/wiki/index.php/서서평 , 「광주이일학교에서 서서평의 교육과 사회활동에 관한 연구」(earticle) https://m.earticle.net/Article/A443435 , 「미국 남장로교 여선교사 엘리자베스 쉐핑의 통전적 선교 연구」(KCI)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682244 , CGN 보도자료 「다큐영화 '서서평' 서울시사회 성황」 https://about.cgntv.net/pr/report/55098.cgn , 목장드림뉴스 「서서평 선교사 다큐영화 개봉」 https://p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58 , 광주교육신문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은 이 여성이었다」 https://www.gwangjuedu.com/jeolla/20019/ , 위키백과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남도일보 「광주 서서평 길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쉐핑」(202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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