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박에스더(김점동) — 언청이 수술을 보고 꿈을 품은 정동 소녀, 1900년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다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서울 정동 골목을 걷다 보면 이화여고 담장과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지금은 조용한 산책길이지만, 140년 전 이곳은 조선 여성들에게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리던 자리였지요. 그 정동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에서 공부하고, 바다 건너 미국에서 의학을 배워 돌아온 한 여성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로 불리는 박에스더, 본명 김점동입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신문 기록을 바탕으로 그녀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정동에서 태어난 소녀 김점동,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 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박에스더는 1877년(고종 14)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광산이고 본명은 김점동(金點童), 아버지는 김홍택, 어머니는 연안 이씨였어요. 다만 위키백과 등 일부 자료는 1876년 3월 16일생으로 적고 있어 출생 연도는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그녀가 서양 선교사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 김홍택이 감리교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했고, 아펜젤러의 소개로 점동은 1887년 한국 근대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에 들어갔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이 세운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었다고 전해지지요. 딸을 서양인이 세운 학교에 보낸다는 것이 낯설고 두려운 일이던 시절, 열 살 남짓한 소녀는 그렇게 신학문의 문을 열었습니다.

■ 세례명 '에스더', 그리고 보구여관의 통역사

점동은 1891년 1월 25일 미국 선교사 프랭클린 올링거에게서 세례를 받고 '김에스더(愛施德)'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훗날 결혼하면서 서양식으로 남편의 성을 따라 '박에스더'가 되었지요. 졸업 무렵에는 학생들과 기도회를 이끌 만큼 신앙이 깊었다고 합니다.

1890년 이화학당을 마친 그녀는 영어 실력이 뛰어나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통역을 맡았습니다. 보구여관은 1887년 감리교 의료선교사 스크랜턴이 미국 감리교 여성해외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운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입니다. 여성이 남자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리던 풍속 때문에 만들어진 곳으로, 한옥을 고친 온돌방 입원실에서 여성 환자를 돌보았어요. 이 병원은 훗날 동대문부인병원을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으로 이어집니다.

■ 로제타 셔우드와의 만남, 언청이 수술에서 찾은 꿈

보구여관에서 그녀의 인생을 바꾼 사람은 의사이자 이화학당 교사였던 로제타 셔우드였습니다. 에스더는 로제타의 통역을 맡으며 환자를 간호하고 약을 짓는 일까지 도왔습니다. 처음에는 수술 보조를 무척 두려워했다고 해요.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차별받던 입술입천장갈림증(언청이) 환자들이 수술을 받고 기뻐하며 퇴원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해, 스스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전해집니다.

1892년 로제타가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하면서 '로제타 셔우드 홀'이 되었고, 에스더도 로제타의 주선으로 1893년 홀 박사를 돕던 청년 박유산(자료에 따라 박여선)과 결혼했습니다. 이듬해인 1894년에는 홀 부부를 따라 평양으로 가 조수로 일했지요.

■ 볼티모어 유학과 남편의 희생, 1900년 한국 최초의 여의사

1895년 에스더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고,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Woman's Medical College of Baltimore)에 입학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선교 여의사들이 도와준 덕분에 가능한 유학이었어요. 남편 박유산은 볼티모어의 식당 등에서 일하며 아내의 공부를 뒷바라지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외조였지요.

그러나 이야기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남편은 에스더가 의사가 되기 직전, 당시 난치병이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키백과는 졸업을 불과 3주 앞둔 때였다고 전합니다. 슬픔을 안고 공부를 마친 에스더는 1900년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사」 항목도 우리나라 여의사로는 이화학당 출신 김점동이 미국에서 의사 자격을 얻고 1900년 귀국해 보구여관에서 진료한 것이 처음이라고 적고 있어요.

■ 가마와 당나귀를 타고 찾아간 환자들, 평양맹아학교와 간호학교

귀국한 에스더는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시작했고, 귀국 후 10개월 동안 돌본 환자가 3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후 로제타 셔우드 홀이 평양에 세운 홀기념병원으로 옮겨,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료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가마를 타고 시골로 환자를 찾아갔고, 가마가 들어가지 못하는 산골에는 걸어서, 혹은 당나귀를 타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고종에게서 은메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진료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위생 교육을 펼치고, 로제타 홀이 시작한 평양의 맹아 교육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평양맹아학교는 로제타 홀이 맹인 소녀 오봉래를 가르치면서 시작된 우리나라 최초의 특수학교로, 로제타는 1898년 뉴욕 점자를 바탕으로 최초의 한글 점자(평양점자)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학교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터가 많은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또 홀과 함께 여성 의료 교육을 위한 간호학교 설립에도 앞장섰습니다.

■ 서른넷의 이른 이별, 그리고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쉼 없이 환자를 돌보던 에스더는 결국 남편을 앗아간 같은 병, 폐결핵에 걸려 1910년 서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사로 일한 지 꼭 10년 만이었지요.

그녀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혔다가 다시 조명받았습니다. 정부는 2006년 김점동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로 선정했는데, 무료 진료를 베풀며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맹아학교와 간호학교 설립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도 그녀를 "우리나라 최초의 정규교육을 받은 여의사"로 기리고 있어요.

여자가 집 밖으로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던 시절, 한 소녀가 품은 "아픈 사람을 고치고 싶다"는 마음은 신앙과 배움을 만나 한 나라 여성 의료의 첫 장이 되었습니다. 오늘 정동길을 걷게 된다면, 그 골목에서 시작된 김점동의 걸음을 한 번쯤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에스더」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898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구녀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228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24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양맹아학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963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점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9851 , 위키백과 「에스더 박」 https://ko.wikipedia.org/wiki/에스더_박 ,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고 김점동(박에스더)여사,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올라」 https://myr.ewha.ac.kr/ewhamed/intro-new/news.do?articleNo=205709&mode=view , 한겨레 「김점동씨 등 4명 '과학 명예의 전당'에」 http://education.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724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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