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한강 언덕에 잠든 15개국 417명의 이야기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2

서울 지하철 2호선·6호선 합정역에서 한강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빌딩 숲 사이로 조용한 언덕 하나가 나타납니다. 오래된 비석들이 나란히 서 있고, 그 너머로 한강 바람이 불어오는 곳. 바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에요. 이곳에는 130여 년 전 낯선 조선 땅을 찾아와 병원과 학교를 세우고, 신문을 만들고, 이 나라의 독립을 함께 걱정했던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기록을 따라, 이 언덕에 담긴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드릴게요.

■ 나루터 언덕이 묘지가 되기까지

양화진(楊花津)은 이름 그대로 한강의 나루터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이 나루를 지키던 양화진영이 있었고, 바로 옆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잠두봉이라 불렸습니다. 중앙일보의 역사 칼럼 '그때 오늘'에 따르면 이곳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이 나타났던 곳이고,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했어요. 개항 뒤에는 외국 상인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로 정해지기도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승태 집필)은 이 묘원을 '1890년 7월 조선 정부의 토지 제공으로 조성된 외국인 묘지'라고 정의합니다. 주조선 미국공사관의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가 양화진 언덕 일대를 외국인 매장지로 정했고, 처음 정한 땅에 민유지가 조금 섞여 있자 같은 해 8월 정부가 토지 대금을 치른 뒤 관리권을 외국인 거류민 자치 기구에 넘겼다고 해요. 그래서 이곳은 서울외국인묘지, 경성구미인묘지, 양화진외인묘지 같은 여러 이름으로도 불려 왔습니다.

■ 첫 안장자, 제중원 의사 헤론

이 언덕에 가장 먼저 묻힌 사람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존 W. 헤론(John W. Heron, 한국 이름 惠論)입니다. 그는 1885년 6월 조선에 와서 왕립병원인 제중원의 원장으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앙일보 '그때 오늘' 칼럼은 그때의 사정을 이렇게 전합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 외국인 장지 문제를 그리 급하게 여기지 않았고, 미국 공사가 서둘러 달라고 재촉해도 한동안 결정을 미뤘다고 해요. 한여름 더위 속에 더 이상 시신을 둘 수 없으니 집 마당에라도 묻겠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조선 정부가 자리를 찾아 나섰고, 그렇게 고른 곳이 한강변 양화진이었습니다. 헤론을 묻은 뒤 조선 정부는 이 일대 땅을 동전 705냥에 사들여 묘지의 범위를 처음으로 정했고, 이후 묘역이 여러 번 넓어질 때도 땅값은 조선 정부가 냈으며 관리는 외국인들이 위원회를 꾸려 맡았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수많은 이방인이 영원히 쉬게 될 자리를 열어 준 셈이에요.

■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지켜 낸 땅

묘원의 역사가 늘 평온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주한 외국인들은 외국인묘지협회(Foreign Cemetery Association)를 조직하고 묘지 규칙을 만들어 이곳을 운영했어요. 1893년 10월에는 영국·미국·러시아·독일·프랑스 다섯 나라 공사가 묘지 둘레에 담장을 쌓아 달라고 조선 정부에 요청했고, 1904년 11월에는 미국 공사 알렌이 묘지 확장과 진입로 보수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1913년 7월 조선총독부 토지대장에는 '경성구미인묘지회' 소유로 올랐지만,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구미 외국인들이 떠나고 1942년 5월 22일에는 외국인 소유 재산이 모두 적산으로 압류되었습니다. 해방 뒤 1946년 10월 1일 다시 묘지회 소유로 돌아왔고, 1979년 지하철 2호선 공사 때 서울시가 묘지를 옮기려 했지만 기독교계가 반대하면서 이전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어요. 1985년 6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가 소유권을 넘겨받아 묘지 안에 선교기념관을 짓고, 1986년 10월 10일 기념관을 완공하면서 이름을 '서울외국인묘지공원'으로 바꾸었습니다.

■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 헐버트와 켄드릭

양화진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꼭 들르는 묘가 있습니다. 바로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의 묘예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인물 소개에 따르면 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23살이던 1886년 7월 4일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조선에 왔습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던 그는 미국으로 쫓겨난 뒤에도 강연과 기고로 한국을 도왔어요.

광복 뒤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헐버트는 1949년 7월 29일, 86세의 몸으로 40여 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긴 여행의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일주일 만인 8월 5일 세상을 떠났지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그의 말에 따라, 유해는 어린 나이에 먼저 떠난 아들이 잠든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말은 지금 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어요.

또 한 사람, 미국 감리교 선교사 루비 켄드릭(Ruby R. Kendrick)의 묘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을 위해 바치리라." 국민일보 칼럼에 따르면 그는 1907년 9월 스물넷의 나이로 조선에 와 개성(송도)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아이들을 돌보다가, 아홉 달 만에 급성 맹장염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한 문장은 지금도 이 언덕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습니다.

■ 언덕에 잠든 사람들, 15개국 417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묘원의 면적을 13,224㎡, 안장자를 15개국 417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족을 포함한 선교사는 145명이라고 해요.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를 세운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그 가족, 배재학당을 세운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일가, 크리스마스 실로 결핵 퇴치 운동을 펼친 셔우드 홀,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 일제에 맞선 영국 언론인 베델,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한 독일 음악가 에케르트 같은 이름들이 이곳에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선교사뿐 아니라 언론·교육·음악 분야에서 이 땅에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고향 대신 한국을 마지막 자리로 택한 것이지요.

2005년 7월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는 선교기념관을 예배당으로 쓰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를 세우고 묘역 관리를 맡겼고, 2006년 5월 이 교회가 묘역의 공식 이름을 지금의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으로 바꾸었습니다.

■ 양화진을 걸으며 생각하는 것

양화진 바로 곁에는 천주교 절두산 순교성지가 있습니다. 한쪽에는 병인박해 때 목숨을 잃은 천주교 신자들의 기억이, 다른 한쪽에는 이 땅에 병원과 학교를 남기고 떠난 개신교 선교사들의 기억이 나란히 깃든 셈이에요. 종교와 국적은 달라도 '누군가를 위해 자기 삶을 내어 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곳은 묘하게 닮았습니다.

방문하신다면 비석 앞에 잠시 서서 이름과 생몰 연도, 짧은 묘비명을 천천히 읽어 보시길 권해요. 스물 몇 살에 바다를 건너온 젊은이의 나이와, 그가 남긴 한 줄의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을 거예요. 관람 시간과 안내 프로그램은 바뀔 수 있으니 묘원 누리집(yanghwajin.net)에서 미리 확인하고 가시면 좋습니다. 가을빛이 짙어지는 요즘, 한강을 내려다보는 그 언덕에서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한 번쯤 조용히 떠올려 보시면 어떨까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5892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사 소개 - 헐버트' https://yanghwajin.net/story/info.php?cat_no=1&idx=24&mode=view , 중앙일보 '[그때 오늘] 한국에서 봉사하다 죽은 외국인의 안식처, 양화진 묘지 조성' https://www.joongang.co.kr/article/4346045 , 연합뉴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머 헐버트 박사' https://www.yna.co.kr/view/AKR20191031126800005 , 국민일보 '[겨자씨] 천 개의 생명'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1708841468 , 위키백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https://ko.wikipedia.org/wiki/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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