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더 테레사(마더 데레사, 1910년 8월 26일~1997년 9월 5일)는 인도 콜카타(옛 캘커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를 세워 버려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본 가톨릭 수녀로,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2016년 9월 4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성인품에 올라 '콜카타의 성녀 데레사'가 되었습니다. 축일은 선종한 날인 9월 5일이며, 한국에는 1981년·1982년·1985년 세 차례 다녀갔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어머니"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분이 흰 사리에 푸른 줄무늬를 두른 작은 수녀님을 떠올리실 거예요. 오늘은 위키백과(한국어·영어)와 가톨릭신문, 경향신문·매일경제의 당시 기사, 국가기록원 자료를 바탕으로 마더 테레사의 삶을 차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스코페에서 태어난 소녀 아녜저, 열여덟 살에 집을 떠나다
마더 테레사의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입니다. 1910년 8월 26일, 당시 오스만 제국에 속했던 스코페(지금의 북마케도니아 수도)에서 알바니아계 가톨릭 가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니콜은 시 의원으로 활동하다 1919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신앙 안에서 자녀들을 길렀습니다.
1928년, 열여덟 살의 아녜저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아일랜드 라스판햄의 로레토 수녀회에 들어갔습니다. 인도에서 활동하던 로레토 수녀회가 영어로 가르쳤기 때문에 먼저 영어를 배우러 간 것이었지요. 이때 집을 떠난 뒤로 그녀는 어머니와 언니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알바니아 공산 정권이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르질링에서 받은 이름, 그리고 '부르심 안의 부르심'
1929년 인도에 도착한 그녀는 히말라야 기슭의 다르질링에서 수련을 받으며 벵골어를 익혔고, 1931년 5월 24일 첫 서원을 했습니다. 수도명은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인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소화 데레사)에서 따왔는데, 같은 이름을 고른 수녀가 이미 있어서 스페인어 표기인 '테레사'를 택했다고 합니다. 이후 콜카타의 로레토 학교에서 오래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삶을 바꾼 날은 1946년 9월 10일이었습니다. 연례 피정을 위해 콜카타에서 다르질링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그녀는 훗날 '부르심 안의 부르심'이라고 부른 체험을 합니다. "수녀원을 떠나 가난한 이들 가운데 살면서 그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었습니다." 그녀는 1948년 로레토 수도복 대신 푸른 테두리를 두른 흰 무명 사리를 입고, 파트나에서 기초 의료 교육을 받은 뒤 콜카타의 빈민가로 들어갔습니다.
사랑의 선교회와 '순결한 마음의 집'
1950년 10월 7일, 교황청의 허가를 받아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가 정식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이 공동체가 "굶주린 이, 헐벗은 이, 집 없는 이, 몸이 불편한 이, 눈먼 이, 나병 환자, 사회에서 원치 않고 사랑받지 못하는 모든 이"를 돌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1952년에는 콜카타 시청이 내준 칼리 신전 옆 건물에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집 '니르말 흐리다이(순결한 마음의 집)'를 열었습니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앙에 따라 마지막을 맞았습니다. 무슬림은 꾸란을 읽었고, 힌두교인은 갠지스 강물을 받았으며, 가톨릭 신자는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처음에 의심하던 힌두교도들도 종교를 가리지 않는 수녀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어 1955년 어린이의 집 '시슈 브하반', 1968년 한센병 환자 마을 '샨티 나가르(평화의 마을)'가 차례로 세워졌습니다.
노벨 평화상, 그리고 세상 곳곳으로
1979년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그녀는 "배고프고 헐벗고 집 없고 병들어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1980년에는 인도 최고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도 받았습니다. 1982년 레바논 전쟁 중 베이루트에서는 일시 휴전을 이끌어 내 병원에 갇힌 어린이 37명을 구했고, 체르노빌 원전 사고 피해자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피해자를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혈통으로는 알바니아인, 국적으로는 인도인, 신앙으로는 가톨릭 수녀입니다. 소명으로는 온 세상에 속하고, 마음으로는 온전히 예수님의 성심에 속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녀가 선종할 무렵 사랑의 선교회는 123개 나라에서 610곳의 선교 거점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의 한국 방문 — 김포공항에서 판문점까지
마더 테레사는 1981년 5월 3일 오후 김포공항에 처음 도착해 김수환 추기경의 영접을 받았습니다(경향신문). 가톨릭신문에 따르면 당시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의 초청이었고, 손에는 성경과 묵주, 헝겊 가방뿐이었다고 합니다. 서강대와 효성여대, 희망원, 절두산 순교성지를 찾았고, 어린이날에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 서울 분원과 사당동 판자촌을 방문했습니다(매일경제). "가난을 구제할 수 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는 "여러분과 내가 가난을 나눌 때 벌써 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두 번째는 1982년 4월 28일, 1981년 7월에 문을 연 사랑의 선교 수녀회 한국 분원을 돌아보기 위한 18시간짜리 짧은 방문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1985년 1월 26일부터 5박 6일 동안으로, 판문점을 찾아 북녘에도 평화가 깃들기를 기도했고 안양의 수녀원에 머물며 라자로 마을을 방문했습니다(국가기록원·가톨릭신문). 한국에는 사랑의 선교 수사회가 1977년, 수녀회가 1981년에 들어왔습니다.
어둠 속의 믿음, 그리고 성녀 데레사
그녀는 1997년 3월 총원장직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9월 5일 콜카타에서 87세로 선종했습니다. 인도 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한국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습니다(KBS). 2007년 공개된 편지 모음 『와서 나의 빛이 되어라(Come Be My Light)』에는 그녀가 오랜 세월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는 깊은 영적 어둠 속에서도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는 고백이 담겨 많은 이를 놀라게 했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3년 10월 19일 그녀를 복녀로 선포했고, 교황 프란치스코는 두 번째 기적을 인정한 뒤 2016년 9월 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날 이탈리아 각지의 노숙인 1,500명이 함께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계청년대회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의료 환경과 기부금 사용, 낙태 반대 입장 등을 두고 비판한 목소리도 있었고, 교황청은 시복 과정에서 이런 비판을 검토한 뒤 장애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서울에서만이라도 아무도 고독하고 버림받은 상태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도록 사랑을 실천한다면 세상의 가난은 사라질 것"이라던 그녀의 말은, 오늘 내 곁의 외로운 한 사람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출처: 위키백과 「테레사 수녀」 https://ko.wikipedia.org/wiki/테레사_수녀 , Wikipedia "Mother Teresa" https://en.wikipedia.org/wiki/Mother_Teresa , 가톨릭신문 「성녀 마더 데레사 삶과 영성」(2016.9)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1609060166549 , 경향신문 「[어제의 오늘] 1981년 마더 테레사 수녀 방한」(2011.5.2) https://www.khan.co.kr/article/201105022127195 , 매일경제 1981.5.6·1982.4.29 기사, 국가기록원 「테레사 수녀 방한」(198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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