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륙재 뜻 — 물과 육지를 떠도는 고혼과 아귀에게 법식을 베푸는 불교 의식, 양무제 505년 금산사에서 고려 갈양사·조선 진관사 국행수륙재까지 역사, 국가무형유산 진관사·삼화사·아랫녘 수륙재 특징과 순서 정리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4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를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배고픔에 괴로워하는 아귀(餓鬼)를 달래기 위해 불법을 들려주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 의식입니다. 중국 양나라 무제가 505년 금산사에서 처음 베풀었고, 우리나라에서는 970년(고려 광종 21) 갈양사에서 연 수륙도량이 최초의 예로 전합니다. 오늘날 서울 은평구 진관사 수륙재와 강원 동해시 삼화사 수륙재가 2013년 12월 31일, 경남 창원 백운사의 아랫녘 수륙재가 그 뒤를 이어 국가무형유산(옛 중요무형문화재)으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습니다.

아래에서는 수륙재 뜻과 이름의 의미, 중국과 고려·조선을 거친 역사,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세 수륙재의 특징, 의식이 진행되는 순서와 장엄, 그리고 영산재·49재와의 차이와 참관할 때 알아 두면 좋은 점을 차례로 정리합니다.

수륙재 뜻, 왜 '물과 육지'의 재일까

수륙(水陸)은 말 그대로 물과 육지를 뜻하고, 재(齋)는 부처님과 보살께 공양을 올리며 기도하는 불교 의식을 가리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수륙재를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례라고 정의합니다. 수륙도량, 수륙법회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이 의식의 핵심은 대상이 특정한 한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돌봐 줄 후손이 있는 영혼이든 없는 영혼이든, 이른바 유주무주(有住無住)의 고혼을 가리지 않고 모두 초청해 법식(法食)을 고루 베풉니다. 그래서 수륙재는 평등하게 베푸는 법회라는 뜻의 무차대회(無遮大會)와 맞닿아 있으며, 전쟁이나 재난으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는 국가 차원의 의례로 자주 열렸습니다.

수륙재의 역사, 양무제에서 고려·조선 국행수륙재까지

수륙재는 중국 양나라 무제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던 무제는 떠도는 고혼들을 널리 구제하는 일이 가장 큰 공덕이라 여겨, 승려들과 상의해 직접 의식문을 만들고 505년 금산사에서 수륙도량을 베풀었습니다. 이후 당나라에서 크게 융성했고, 송나라 희령 연간에는 동천이 『수륙문』 3권을 다시 지어 널리 퍼뜨렸습니다.

우리나라 수륙재는 고려 때부터 확인됩니다. 광종 대에 때때로 성대하게 열렸으며, 970년 갈양사에서 개설한 수륙도량이 최초의 예로 꼽힙니다. 다만 인천 수륙재 항목처럼 971년(광종 22) 혜거국사가 처음 시행했다고 전하는 기록도 있어 연도는 자료에 따라 한 해 차이가 납니다. 선종 때에는 최사겸이 송나라에서 「수륙의문」을 구해 왔고, 이를 계기로 보제사에 수륙당을 세웠습니다. 고려 말에는 일연의 제자 혼구가 『신편수륙의문』 2권을 지어 의식이 더욱 널리 행해졌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지만 수륙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1395년(태조 4) 건국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씨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견암사, 석왕사 관음굴, 그리고 삼화사 등에서 수륙재를 베풀었고, 1397년(태조 6)에는 왕명으로 진관사에 수륙사를 지어 국행수륙재를 여는 사찰로 삼았습니다. 이후 국행으로 거행하는 문제를 두고 논란이 거듭되었지만 오랜 전통은 이어졌고, 의식문은 『범음집』, 『천지명양수륙재의문산보집』, 백파의 『작법귀감』, 『석문의범』 등에 실려 오늘까지 전합니다.

국가무형유산 수륙재 세 곳, 진관사·삼화사·아랫녘

진관사 수륙재는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전승됩니다. 조선 왕실 중심의 수륙재를 잇는 의식으로, 승려 진관과 자운의 노력으로 1977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현되었고 2010년 장엄과 지화 일체를 복원한 뒤 2013년 12월 31일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재차 가운데 수륙연기가 특징이고, 서울·경기 지역의 경제 어산이 범패와 작법무를 맡으며 진관사수륙재학교를 중심으로 전승 활동이 활발합니다. 관리단체는 (사)국가무형유산 진관사수륙재보존회입니다.

삼화사 수륙재는 강원 동해시 두타산 삼화사에서 전승됩니다. 1395년 국행수륙대재를 삼화사에서 연 것이 시초이며,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를 바탕으로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습니다. 2001년 보존회를 결성해 의례집 번역과 연구서 발간으로 복원의 바탕을 다진 뒤 같은 날 국가무형유산이 되었습니다. 매년 10월 셋째 주 3일 동안 열리며, 방생과 조전점안이운의식이 특징으로 꼽힙니다. 신도들이 설행 준비와 진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도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아랫녘 수륙재는 경남 창원 백운사에서 전승됩니다. 아랫녘은 서울·충청의 윗녘에 대응해 경상도를 이르는 말로, 범패와 작법무에서 영남의 지역적 특징이 뚜렷합니다. 상단·중단·하단·고사단·증명단·신중단·사자단·오로단·마구단·봉영부욕단의 10단과 외대령소·소전소·유나소·정재소·관욕소의 5소를 기본으로 차리고, 괘불과 연, 깃발, 번, 지화, 지전으로 장엄합니다. 육재 이틀 뒤 용왕재를 따로 여는 것도 이 수륙재만의 특징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표기 기준 지정일은 2014년 3월 18일입니다.

수륙재 순서, 49일 칠칠재와 낮재·밤재

진관사와 아랫녘 수륙재는 49재처럼 칠칠재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양력 8월 말 무렵 입재를 시작해 7일 간격으로 초재부터 6재까지 의례를 올리고, 10월 둘째 주 토요일 무렵 마지막 회향을 낮재와 밤재로 나누어 이틀 동안 치르며 마무리합니다. 모두 합하면 약 49일에 걸친 긴 의례입니다.

의식은 크게 부처님과 보살을 모시는 상단, 명부의 권속을 청하는 중단, 그리고 떠도는 고혼과 아귀에게 법식을 베푸는 하단으로 짜입니다. 영혼을 의식 도량으로 맞아들이고, 몸과 마음을 씻기는 관욕을 거쳐,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려주고 음식을 베푼 뒤, 마지막에 종이로 만든 장엄물과 위패를 태워 떠나보내는 봉송으로 끝맺는 흐름입니다. 이 과정마다 범패라는 불교 음악과 바라춤·나비춤 같은 작법무가 더해져 의례가 장엄하고 화려하게 꾸며집니다.

수륙재와 영산재·49재, 무엇이 다를까

49재는 돌아가신 한 분을 위해 49일 동안 7일마다 올리는 천도재이고,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산회상을 재현하며 영혼을 천도하는 큰 규모의 49재 형식입니다. 이에 비해 수륙재는 특정한 망자 한 사람보다 물과 육지를 떠도는 모든 고혼과 아귀를 차별 없이 불러 공양하는 데 무게를 둔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나라에서 여는 국행수륙재가 많았고, 전란과 재난의 희생자를 위로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수륙재를 참관할 때는 공연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사진은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찍고, 축원이나 봉송처럼 엄숙한 순간에는 합장하고 함께 마음을 모으면 됩니다. 일정은 해마다 사찰과 보존회가 공지하므로 방문 전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로 영산재 뜻, 49재 뜻, 지장보살 뜻을 다룬 글도 신이말했다 불교 게시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륙재', '진관사 수륙재', '삼화사 수륙재', '아랫녘 수륙재', '신편수륙의문', '인천 수륙재' 항목,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가무형유산 '진관사 수륙재'·'삼화사 수륙재'(2013.12.31 지정), 『범음집』, 『석문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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