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제중원 — 칼에 베인 민영익을 살린 서양 의술, 1885년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과 의료선교사 알렌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6

한국 개신교의 첫 발걸음을 이야기할 때, 많은 분들이 교회 건물보다 먼저 떠올리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병원입니다. 선교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던 1880년대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설교단보다 진료실에서 먼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출발점이 1885년 서울 재동에 문을 연 제중원(濟衆院)입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연세대학교 연혁 자료, 한국어 위키백과에 정리된 기록을 따라, 칼에 베인 한 사람을 살린 일이 어떻게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으로 이어졌는지 차분히 살펴보겠습니다.

■ 선교사 대신 '공사관 의사'로 온 알렌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한국 이름 안련)은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나 의사 면허를 받은 뒤 중국 상하이로 파송되었다가, 조선행을 자원해 1884년 9월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위키백과는 그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한국에 파송된 첫 개신교 선교사로 꼽힌다고 소개합니다.

다만 당시 고종이 허락한 개신교 선교회 사업은 교육과 의료에 한정되어 있었고, 전도의 자유는 아직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렌은 미국 공사 푸트의 조언에 따라 선교사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온 사람이 청진기를 먼저 든 셈입니다.

■ 갑신정변의 밤, 민영익을 살린 서양 의술

알렌이 조선에 온 지 석 달쯤 지난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김옥균 등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터졌습니다. 이 자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온몸을 크게 다쳐 생사를 오갔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알렌이 서양 의술로 민영익을 살려 냄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빨라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외과 수술로 상처를 꿰매고 치료해 회복시킨 이 일은, 서양 문물을 살피던 조선 정부에 외과술의 장점을 생생하게 보여 준 사건이었습니다.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얻어 왕실의 의사가 되었고, 곧 정식 병원을 세우자는 건의를 올립니다.

■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두 주 만에 바뀐 이름

고종은 알렌의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병원은 갑신정변으로 역적이 된 홍영식의 집, 지금의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에 마련되었습니다. 진찰실과 수술실, 대기실을 갖추었고, 외교 업무를 맡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소속되었습니다.

처음 받은 이름은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 광혜원(廣惠院)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2주 남짓 뒤인 4월 26일, 『논어』의 '박시제중(博施濟衆,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에서 따온 제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지만, 충청도에 있던 같은 이름의 원(院, 관리 숙소)과 헷갈리지 않게 하려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설명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개원 날짜입니다. 연세대학교는 1885년 4월 10일을,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는 4월 9일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제중원 항목은 양력 4월 14일(음력 2월 29일)을 적고 있습니다. 위키백과도 1885년 4월인 것은 확실하지만 3일·9일·10일·14일 설이 함께 전한다고 정리합니다. 날짜는 조금씩 달라도, 1885년 봄 조선 정부가 세운 첫 서양식 병원이라는 사실은 모든 기록이 같습니다.

■ 첫 해 환자 1만 명, 그리고 열여섯 명의 의학생

제중원은 문을 열자마자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알렌과 헤론이 1886년 미국 북장로회에 낸 첫해 보고서에 따르면, 개원 뒤 1년 동안 진료한 환자는 10,460명이었습니다. 가장 많은 병은 말라리아였고, 소화 불량과 각종 피부병, 결핵과 기생충병, 각기병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반들은 주로 집으로 의사를 불렀고, 지방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환자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알렌 혼자로는 감당할 수 없어 스크랜턴, 헤론, 언더우드 등 여러 선교사가 차례로 진료를 도왔습니다. 1886년 3월에는 각 도에서 선발한 학생 16명으로 제중원의학당을 열어 서양 의학 교육도 시작했습니다. 이 교육은 정부의 재정난 등으로 한동안 끊겼다가, 1893년 내한한 올리버 에비슨이 다시 이어 갔습니다. 병원은 1886~1887년 무렵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입구 일대)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 세브란스의 기부, 남대문 밖 새 병원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이어지며 조선은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때 고종과 조선 정부는 제중원의 소유권은 그대로 둔 채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넘겼습니다. 에비슨은 1899년 안식년에 미국의 사업가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에게서 큰 기부를 받았고, 그 돈으로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도동, 지금의 서울역 앞)에 새 병원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세브란스병원입니다. 1905년에는 제중원 터와 건물이 대한제국 정부에 반환되었습니다.

1908년 6월에는 김필순, 박서양 등 7명이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제1회로 졸업해 한국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습니다. 연세대학교는 광혜원·제중원을 학교 역사의 시작으로 기념하고, 서울대학교병원은 제중원이 정부가 세운 국립기관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 뿌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이 작은 병원이 한국 근대 의학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크다는 뜻이겠지요. 알렌 개인을 두고는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는 평가와 함께, 뒤에 외교관이 되어 미국의 이권 사업에 관여했다는 비판도 함께 전해집니다.

■ 진료실에서 시작된 이웃 사랑

제중원 이야기는 개신교가 이 땅에 처음 뿌리내린 방식을 보여 줍니다. 설교보다 먼저 상처를 싸매 주었고, 교회보다 먼저 병원이 문을 열었습니다. 언더우드 역시 개원 직전에 들어와 제중원 일을 도우며 교육과 전도를 시작했다고 연세대학교는 전합니다. '널리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병원의 이름은 유교 경전에서 왔지만, 아픈 이를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과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습니다.

오늘 병원 앞을 지나거나 아픈 가족을 돌보는 순간, 140여 년 전 재동의 한 한옥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를 맞았던 제중원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작은 손길이 한 나라의 의학과 신앙의 역사를 함께 열었다는 사실이 잔잔한 위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중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479 , 「연세대학교의료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6829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사 「제중원 설립」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mid/hm_138_0020?tabId=e , 연세대학교 「연희·세브란스의 역사」 https://www.yonsei.ac.kr/sc/314/subview.do , 한국어 위키백과 「제중원」 https://ko.wikipedia.org/wiki/제중원 , 「호러스 뉴턴 알렌」 https://ko.wikipedia.org/wiki/호러스_뉴턴_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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