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개신교)

소래교회 — 선교사보다 먼저,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첫 자생 개신교회

신이말했다 운영진조회 4

한국 개신교를 이야기할 때 흔히 1885년 제물포항에 내린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 두 해 전, 외국인 선교사가 오기 전에 이미 한 마을의 초가집에서 예배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松川里) 소래마을에 세워진 소래교회입니다. 오늘은 한국어 위키백과 「소래교회」, 국민일보, 주간기독신문, 평양대부흥 자료실 등에 정리된 기록을 따라,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첫 자생 교회의 이야기를 차분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 소래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소래교회는 솔내교회·송천교회로도 불립니다. 위키백과는 이 교회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자생한 개신교 교회라고 소개하며, 1883년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졌다고 적고 있습니다. ‘소래’라는 이름은 송천(松川), 곧 솔내·솔샘에서 온 토박이말로,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물이 황해로 흘러들던 바닷가 마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한국인 성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모임을 시작하고 예배당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일보도 언더우드·아펜젤러가 1885년 입국하기 전에 생긴 교회라는 점에서 교회사적 의미가 크다고 전합니다.

■ 서상륜·서경조 형제, 만주에서 솔내로

설립의 중심에는 평안도 의주 출신 서상륜과 동생 서경조가 있습니다. 인삼 장사로 만주를 오가던 서상륜은 영국(스코틀랜드) 개신교 선교사 존 로스를 만나 신앙을 받아들였고, 로스의 한글 성경 번역을 도왔습니다. 평양대부흥 자료실에 따르면 그는 한글 성경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에 관헌에 적발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전도가 여의치 않자 형제는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위키백과와 주간기독신문은 1883년 5월 16일, 소래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한국인이 스스로 개신교 교회를 세운 날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모여 조용히 주일마다 집회를 가졌고, 교인이 늘면서 공동체는 점점 커졌습니다.

■ 창립 연도, 왜 이야기가 갈릴까요

소래교회의 창립 연도는 오래도록 1883·1884·1885년 설이 함께 전해져 왔습니다. 국민일보는 2025년 기사에서, 마지막 담임 허간 목사가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분실 당회록’을 근거로 1883년이 가장 유력하다고 정리합니다. 예장합동 총회와 황해노회도 이 해를 기준으로 기념해 왔고, 1984년 복원을 결의해 1988년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옛 예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옥성득 UCLA 교수처럼 연구 관점에 따라 정기예배 시작(1885)이나 언더우드 세례식(1887)을 기준으로 볼 수도 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숫자가 조금 달라도, “선교사보다 먼저 한국인이 모임을 열었다”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습니다.

■ 기와 예배당과 석유램프, 자립의 자존심

모임이 커지자 성도들은 초가를 벗어나 제대로 된 예배당을 짓기로 했습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895년 8칸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고, 1896년 다시 8칸을 증축했습니다. 평양대부흥 자료실은 건축헌금과 자재·품앗이까지 합치면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고 전하면서도,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기록합니다.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모금해 건축비를 돕겠다고 제안했을 때, 교인들은 “우리가 우리 예배당을 세우는데 외국인의 원조를 받는 것은 본의에도 어긋나며, 후세에 전하는 데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사양했다는 일화가 여러 자료에 나옵니다. 언더우드는 그 뜻을 존중하고 석유램프(남포등)를 기증했는데, 그 불빛이 온 동리를 환히 밝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주간기독신문은 교역자 사례비 지원까지 사양했다는 전승도 소개합니다.

소래교회는 이후 신임 서양 선교사들의 한국어 교육 장소로도 쓰였고, 동학농민혁명 시기에는 피신처가 되기도 했다고 위키백과는 전합니다.

■ 새문안과 평양신학교로 이어진 뿌리

소래의 씨앗은 서울과 평양으로도 뻗어 나갔습니다.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가 세운 한국 최초 조직교회 새문안교회 창립 때 참여한 초기 교인들 가운데에도 서상륜이 전도한 이들이 있었고, 서상륜 자신은 새문안교회의 조사로 섬기며 권서로 전국을 돌았습니다. 동생 서경조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으로, 초기 한국인 목사 가운데 한 명이 되었습니다.

원교회가 있던 황해도 터는 분단과 전쟁 이후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황해노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아 복원을 결정했고, 1988년 9월 30일 경기도 용인 총신대 양지캠퍼스에 1896년 증축 당시의 팔작지붕·고패집(ㄱ자) 16칸 기와 예배당을 재현해 두었습니다. 그 뜰에는 서상륜 기념비도 함께 세워져 있어, 오늘도 신학생과 성도들이 기도하고 공부하는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소래에서 듣는 이야기

소래교회는 “선교사가 와서 교회가 생겼다”는 한 줄짜리 통념을 부드럽게 교정해 줍니다. 만주에서 받은 성경 한 권이 솔내 초가로 건너오고, 이웃을 전도하고, 기와를 올리고, 남의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한 성도들의 자존심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창립 연도를 둘러싼 학계의 토론조차, 그 공동체가 얼마나 오래 기억되어 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저녁, 가까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펼칠 때, 140여 년 전 황해도 바닷가 마을에서 처음 모였던 그 초가의 불빛을 한 번 떠올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큰 건물이 아니라, 스스로 모이고 스스로 지은 작은 예배당에서 한국 개신교의 뿌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따뜻한 위로가 되어 줄 테니까요.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소래교회」 https://ko.wikipedia.org/wiki/소래교회 , 국민일보 「우리나라 첫 자생교회인 소래교회 설립 연도는」 https://w3.kmib.co.kr/article/20250114500366 , 주간기독신문 「소래교회 예배당」 https://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503099 , 평양대부흥 「서상륜, 서경조 형제와 소래교회」 http://www.kich.org/news/articleView.html?idxno=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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