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10월이지만, 두 달쯤 지나면 거리 곳곳에서 "딸랑, 딸랑"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빨간 냄비와 제복 차림의 사람들, 바로 구세군 자선냄비입니다. 너무 익숙해서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이 냄비에는 런던 빈민가의 천막 예배와 샌프란시스코 부둣가의 쇠솥, 그리고 1928년 흉년에 시달리던 서울 거리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구세군대한본영」 항목과 구세군역사박물관 연혁, 그리고 한겨레·경향신문·서울신문 등의 보도를 바탕으로 구세군과 자선냄비가 걸어온 길을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 런던 동부 빈민가의 천막에서 시작된 교회
구세군은 1865년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목사가 영국에서 창립한 개신교 교파입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829년 노팅엄에서 태어난 부스는 성공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감리교 신자가 되었고, 1858년 스물아홉 살에 감리교 개혁파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구를 넘어 전국을 다니는 순회 부흥사로 일하고 싶어 했지만, 1861년 리버풀 연회에서 그 요청이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부스는 온 가족을 데리고 런던 동부 빈민가로 들어가 천막을 치고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선교는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표어로 정리되는데, 복음 전도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사회사업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함께 붙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아내 캐서린 부스도 여성 전도자로 활동하며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을 넓히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백과사전은 전합니다.
■ 'Christian Mission'에서 '구세군'으로
1865년 동부 런던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1869년 영국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기독교 선교회(Christian Mission)'로 자랐고, 1878년 구세군(The Salvation Army)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습니다. 구세군역사박물관 연혁에 따르면 1880년에는 런던에 구세군 국제본부가 세워졌습니다.
이름처럼 구세군은 처음부터 군대식 조직을 갖추었습니다. 백과사전은 회의만 거듭하다 일을 놓치지 않고 신속하게 선교하고 봉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사관', 교인은 '병사', 교회는 '영문'이라 부르고, 전 세계 구세군의 최고 지도자는 '대장'이라고 합니다. 구세군 깃발의 빨강은 예수의 보혈, 노랑은 성령의 불, 파랑은 성결을 뜻한다고 하니, 거리에서 깃발을 보게 되면 그 뜻을 한 번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 — 1891년 샌프란시스코의 쇠솥
자선냄비는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성탄절을 앞둔 추운 겨울, 여객선 난파로 1,000명이 넘는 난민이 생겨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자, 구세군 사관 조셉 맥피(Joseph McFee)가 고민 끝에 큰 쇠솥을 오클랜드 부둣가에 내걸었습니다. 솥 위에는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라는 글귀를 붙였습니다.
서울신문은 맥피가 선원 시절 영국 리버풀 항구에서 본 '심슨의 솥', 곧 행인들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돈을 넣던 커다란 솥을 떠올렸다고 전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솥에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대접할 만큼의 성금이 모였고, 이것이 오늘날 세계 곳곳의 자선냄비가 되었습니다. 서울신문은 2015년 기준 124개국에서 자선냄비가 모금에 쓰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 1908년 서울에 온 구세군, 1928년 흉년에 걸린 첫 냄비
한국 구세군의 역사는 1908년 10월 영국 선교사 로버트 허가드(Robert Hoggard, 한국 이름 허가두) 사관 일행이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지금의 서대문구 평동에 본영을 두고 서대문 영문(제1영)을 세웠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09년에는 『구세신문』을 창간해 여성교육과 금주운동, 한글 사용을 알렸고, 1910년에는 구세군사관학교를 세워 한국인 사관을 길러 냈습니다.
그리고 1928년, 한반도에는 홍수와 가뭄이 잇따르며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한겨레는 당시 『동아일보』의 "대한 끝에 홍수, 금년 농사는 다시 가망 없어" 같은 기사를 소개하며, 서대문과 종로 거리를 헤매는 굶주린 사람들이 흔했다고 전합니다. 이 모습을 본 한국 구세군 사령관, 스웨덴 출신 선교사 조셉 바아(한국 이름 박준섭) 사관이 1928년 12월 15일 서울 명동에 자선냄비를 내걸었습니다.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에 따르면 그해 명동·종로·충정로 등에 20여 개의 냄비가 놓였고, 당시 돈으로 812원이 모였습니다. 나무 막대 지지대에 가마솥을 매달고 빨간 양철 뚜껑을 씌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한겨레는 이 성금으로 급식소를 열어 매일 130명가량의 노숙인에게 따뜻한 밥을 대접했다고 전합니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처음에는 '자선남비'라고 불렀는데, 1988년 표준어 규정이 바뀌면서 지금의 '자선냄비'가 되었습니다.
■ 전쟁 속에서도 끓었던 냄비, 정동에 남은 붉은 벽돌집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39년부터 일제의 강압으로 구세군은 '구세단'으로 바뀌었고, 1944년에는 모든 교회가 이른바 '합동교단'에 편입되며 명맥을 잃기도 했습니다. 광복 뒤 다시 일어섰지만 6·25전쟁으로 78개 교회와 여러 사회사업 시설을 북한에 남겨 두어야 했고, 노영수 참령을 비롯한 많은 사관이 순교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냄비는 끓었습니다. 서울신문은 1951년 피란지 부산 남포동 등에 12월 21일부터 6일 동안 자선냄비가 놓여 3,000환이 모였고, 휴전 뒤인 1953년에는 서울 도심 다섯 곳에서 6만 6,887환이 모였다고 기록합니다.
서울 덕수궁 돌담길 끝 정동에는 1928년에 지은 구세군사관학교 건물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959년부터 '구세군 중앙회관'이라는 이름을 함께 썼고, 2002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2003년 10월 한국 선교 95주년을 맞아 이곳에 구세군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2019년 10월에는 복합문화공간 '정동1928아트센터'도 생겼습니다. 정동길을 걷다 들러 보면 옛 자선냄비와 사관들의 유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 98번째 겨울을 앞둔 빨간 냄비
지난해 겨울, 구세군은 2025년 11월 2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Light of Hope-희망의 빛'을 주제로 시종식을 열고 12월 31일까지 전국 300여 곳에서 모금했습니다. 아시아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이때 스마트폰을 모금판에 한 번 대기만 하면 되는 NFC 기부가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는 시대에 맞춘 변화입니다.
다만 마음 한쪽이 무거운 소식도 있습니다. 서울신문은 2026년 2월, 지난해 거리 모금액이 21억 1,000만 원으로 2022년 22억 7,000만 원 이후 3년 연속 줄었다고 전했습니다. 구세군 관계자는 봉사자가 줄면서 냄비 설치 지점도 줄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크리스천투데이 인터뷰에서 구세군은 현금을 매일 수거해 CCTV가 있는 금고에 보관하고, 행정안전부에 미리 낸 모집계획에 따라 쓰며, 외부 회계감사와 홈페이지 공시로 사용 내역을 공개한다고 설명했습니다.
1928년 첫 냄비부터 따지면 올겨울은 98번째 겨울입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추운 거리에서 종을 흔드는 사람들 곁을 지나칠 때 동전 하나, 혹은 따뜻한 눈인사 하나를 건네 보는 건 어떨까요. 부스 목사가 말한 '손길은 이웃에게'는 어쩌면 그렇게 작은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구세군대한본영」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868 , 구세군역사박물관 연혁 https://museum.salvationarmy.or.kr/intro/history.php , 한국구세군 역사 https://www.thesalvationarmy.or.kr/about/we/history , 한겨레 「구세군 자선냄비는 한반도 대기근 때 처음 등장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23656.html , 경향신문 「[어제의 오늘] 1928년 구세군 냄비 국내 첫 등장」 https://www.khan.co.kr/article/200812141832445 , 서울신문 「점점 똑똑해지는 냄비, 87년간 사랑을 끓이다」 https://www.seoul.co.kr/news/society/2015/12/05/20151205013003 , 중앙일보 「[우리말바루기] 자선냄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41 , 아시아투데이(네이트뉴스) 「2025년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 시작」 https://news.nate.com/view/20251128n17942 , 서울신문 「지갑 닫힌 거리…구세군 냄비 모금 3년째 '뒷걸음질'」 https://www.seoul.co.kr/news/society/accident/2026/02/13/20260213500011 , 크리스천투데이 「자선냄비, 모금 후 관리는 누가 어떻게 하나요?」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7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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