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사천왕(四天王)은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며 부처님과 불법, 그리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네 명의 수호신입니다.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 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 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절에서는 일주문을 지나 두 번째로 만나는 천왕문(사천왕문)에 3~4m에 이르는 커다란 사천왕상을 모셔 두며, 조선 후기 이후에는 대개 비파, 칼, 용과 여의주, 당(깃발)과 탑을 손에 든 모습으로 정형화되었습니다.
절에 들어서다 눈을 부릅뜬 거대한 장수상에 깜짝 놀란 기억이 있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무섭게만 보이는 이 네 천왕은 누구이고, 왜 하필 절 입구를 지키고 있을까요?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사천왕', '사천왕상', '사천왕문' 항목과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설명(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자료를 바탕으로 사천왕의 이름과 뜻, 손에 든 물건으로 구별하는 법, 우리나라 사천왕상의 역사까지 차근차근 정리해 보겠습니다.
사천왕 뜻 — 인도의 신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하던 귀신들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다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의 교화를 받고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 곧 호법천왕(護法天王)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사천왕을 불법을 바깥에서 지켜 주는 외호신(外護神)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세상의 중심에는 수미산(須彌山)이라는 거대한 산이 있습니다. 사천왕은 그 중턱에 있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다스립니다. 사천왕천은 욕망이 남아 있는 여섯 하늘(육욕천) 가운데 첫째, 곧 천상계에서 가장 낮은 하늘입니다. 우리말샘의 풀이에 따르면 사천왕은 위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거느리며, 불법에 귀의한 중생을 보호합니다. 또 사바세계의 사람들이 불도에 따라 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살피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역할도 맡고 있다고 설명됩니다.
사천왕 이름 — 지국천왕·광목천왕·증장천왕·다문천왕
첫째,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산스크리트어 이름 드리타라슈트라(Dhṛtarāṣṭra)를 옮긴 제두뢰타천왕이라고도 부릅니다. '나라를 지닌다(持國)'는 이름처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안민(安民)의 신으로, 수미산 동쪽 중턱 황금타(黃金埵)의 천궁에 삽니다.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사람들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얼굴은 푸른빛으로 표현되고, 음악의 신 건달바를 거느립니다.
둘째,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비루박차천왕(Virūpākṣa)이라고도 하며, 수미산 중턱 백은타(白銀埵)에 삽니다. 잡어(雜語), 비호보(非好報), 악안(惡眼)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고 눈을 크게 부릅떠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는 데서 '넓은 눈', 곧 광목(廣目)이라는 이름이 나왔습니다. 죄인에게 벌을 내려 큰 고통을 겪게 하는 가운데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겠다는 것이 그의 서원이며, 용과 비사사를 권속으로 거느립니다.
셋째,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비루륵차천왕(Virūḍhaka)이라고도 하며 수미산 남쪽 유리타(瑠璃埵)에 삽니다. '늘리고 키운다(增長)'는 이름처럼 자신의 위덕을 늘려 만물이 태어날 수 있도록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고, 우리말샘에서는 자기와 남의 선근(善根)을 늘어나게 하는 천왕으로 풀이합니다. 몸은 붉은빛, 눈은 성난 모습이 특징이고 구반다 등 많은 귀신을 거느립니다.
넷째,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 Vaiśravaṇa)이라고도 합니다. 늘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며 부처님의 설법을 많이 듣는다고 해서 '많이 듣는다(多聞)'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수미산 북쪽 수정타(水精埵)에 살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립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중생을 건진다는 뜻에서 얼굴을 검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사천왕 구별법 — 비파·칼·용과 여의주·탑, 그런데 이름이 헷갈리는 이유
사천왕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표식은 북방 다문천왕이 든 탑(보탑)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사천왕상이 주로 칼, 화살, 창, 금강저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고, 북방천왕만은 반드시 탑을 받들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도 다문천왕의 보탑이 수많은 신장상 가운데 사천왕을 가려내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소개합니다.
경전마다 손에 든 물건, 즉 지물(持物)에 대한 설명도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동방 지국천왕을 두고 다라니집경은 왼손에 칼, 오른손에 보주를 든다고 하고, 일자불정륜경은 왼손에 창을 쥔다고 하며, 약사여래유리광칠불본원공덕경은 비파를 든다고 적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의 지물은 비파, 칼, 용과 여의주, 당과 탑으로 정형화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변화가 원나라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약사칠불의궤공양법 영향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합니다.
천왕문 안 배치도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입구에서 들어가며 보았을 때 오른편의 대웅전 쪽에 비파를 든 천왕, 입구 쪽에 칼을 든 천왕을 두고, 왼편의 대웅전 쪽에 당과 탑을 든 천왕, 입구 쪽에 용과 여의주를 든 천왕을 둡니다.
문제는 이름입니다. 같은 비파를 든 천왕을 두고 동방 지국천왕이라 부르는 경우와 북방 다문천왕이라 부르는 경우가 함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선 후기 사천왕 조각상과 중국 원·명·청대 조각상은 비파를 든 천왕을 동방 지국천왕이라 부르지만, 조선 후기 사천왕 탱화에서는 칼을 든 천왕을 동방 지국천왕이라고 적었습니다. 실제로 국가유산청의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설명에서는 비파를 든 상을 북방 다문천왕, 검을 든 상을 동방 지국천왕, 당을 든 상을 서방 광목천왕, 용과 여의주를 든 상을 남방 증장천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 집필자는 북방 다문천왕이 보탑을 받든다는 원칙에 비추어 비파를 든 천왕을 동방 지국천왕으로 보는 쪽이 옳다고 판단하지만, 절마다 안내판의 이름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아 두면 덜 헷갈립니다.
우리나라 사천왕상의 역사 — 감은사 사리기에서 조선 천왕문까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우리나라에서 사천왕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를 사천왕 신앙이 들어온 600년 무렵으로 보고, 크게 성행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무렵부터라고 설명합니다. 『삼국유사』에는 당대의 이름난 장인 양지(良志)가 영묘사에 사천왕상을 만들었고 이어 사천왕사도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682년에 세워진 경주 감은사 삼층석탑의 사리기에는 정교한 금동사천왕입상이 장식되어 있고, 본격적인 사천왕상으로는 토함산 석굴암 통로(연도) 양쪽에 새긴 부조상이 꼽힙니다. 이후 신라 석탑의 몸돌에 사천왕을 새기는 일이 활발해졌고, 9세기에는 염거화상탑(844년), 쌍봉사 철감선사탑(868년), 봉암사 지증대사탑(884년), 실상사 수철화상탑(894년) 같은 고승의 사리탑에도 사천왕이 새겨졌습니다. 사방을 지키는 신이라는 의미가 넓어져 부처와 사리, 불국토, 나아가 나라를 악으로부터 지키는 신장으로 믿어졌던 것입니다.
고려시대 유물로는 영주 부석사 조사당의 사천왕 벽화가 대표적입니다. 1337년에는 양산 통도사에 천왕문이 처음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평지의 절이 산속 절로 바뀌면서 천왕문이 따로 세워지고 그 안에 사천왕상을 모시는 출발점으로 주목받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천왕문 안의 거대한 사천왕상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목조상은 장흥 보림사(1539년), 청도 적천사(1690년), 남해 용문사(1702년), 하동 쌍계사(1704년), 서울 봉은사(1901년) 등에, 흙으로 빚은 소조상은 보은 법주사(1624년), 순천 송광사(1628년), 구례 화엄사(1632년), 완주 송광사(1649년), 홍천 수타사(1676년) 등에 남아 있습니다. 소조상은 주로 임진왜란 뒤 인조 때, 목조상은 숙종 때 많이 만들어졌고, 천왕문에 사천왕상을 갖춘 절 상당수가 임진왜란 때 승병이 모였던 곳이라는 점에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의 뜻도 함께 읽힙니다. 인조 때 사천왕상 제작을 이끈 벽암각성 대사는 서산·사명 대사의 뒤를 이어 팔도 도총섭으로 승병을 이끈 인물이기도 합니다.
무서운 얼굴에 담긴 뜻 — 천왕문을 지날 때 알아 두면 좋은 것
조선 후기 사천왕상은 갑옷을 입은 장수의 모습이지만, 보살처럼 화려한 보관을 쓰고 휘날리는 천의를 걸치며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함께 지닙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위협적인 형상 위에 자비의 모습을 담으려는 의도로 풀이합니다. 대부분 눈을 치켜뜨고 입을 악다물거나 크게 벌린 분노상이지만, 비파를 든 천왕만은 반쯤 감은 눈과 노래하는 듯한 입으로 인자한 인상을 줍니다. 발밑에는 흔히 악귀를 밟고 있는데, 조선시대 이전에는 주로 동물을, 조선시대에는 사람이나 악귀 모습을 밟는 경우가 많습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처럼 새로운 표현이 들어간 경우도 있습니다. 국가유산청 설명에 따르면 이 상은 정유재란으로 훼손된 것을 1628년에 다시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서방 광목천왕의 지물 가운데 새끼호랑이가 등장하는 독특한 도상으로 학술적 가치가 큽니다.
그렇다면 왜 사천왕을 문에 모실까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왕문' 항목은 절을 바깥에서 지킨다는 뜻과 함께, 드나드는 사람들이 이 수호신들 덕분에 모든 악귀가 물러난 깨끗한 도량에 들어선다는 마음을 갖게 하려는 뜻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수행의 상징으로 보면 한마음(일심)을 뜻하는 일주문을 지나 이제 수미산 중턱의 청정한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천왕문 앞에 금강역사를 그리거나 모셔 금강문 역할을 함께 하게 하는 절도 있습니다.
다음에 절을 찾을 때는 천왕문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탑을 든 천왕이 누구인지, 비파를 든 천왕은 어떤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지 살펴보세요. 무섭게만 보이던 네 천왕이 바른 삶을 지켜보고 이끌어 주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 절에 들어서는 첫걸음이 훨씬 새롭게 느껴질 것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천왕'·'사천왕상'(문명대 집필, 2024년 5월 최종수정)·'사천왕문'(최선아 집필, 2024년 12월 최종수정) 및 각 항목 주석(우리말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상'(보물),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인문학 Encyves 위키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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