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경기도 남쪽 마을들에서는 예부터 마을을 지켜 주는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께 한 해의 고마움을 전하고 다음 해의 안녕을 비는 큰 굿판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기도 도당굿(京畿道都堂굿)입니다. 장구와 피리, 해금 가락에 화랭이들의 춤과 재담이 어우러지던 이 마을굿은 1990년 10월 10일 국가무형유산(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으로 지정되어 지금까지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오늘은 도시 한복판에서도 꺼지지 않고 이어져 온 경기도 도당굿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려드리려 합니다.
■ 도당굿이란 — 마을의 수호신 '도당'께 올리는 마을굿
도당굿은 한 집안의 복을 비는 집굿과 달리,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마을굿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경기도 도당굿을 "11월 초순경 경기 남부 지역에서 세습무들이 행하는 마을굿"이라고 정의합니다. 마을의 태평과 풍요를 빌고, 집집마다의 평안과 자손 번창을 함께 축원하는 자리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같은 경기도라도 지역에 따라 굿의 모습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한강 이북에서는 주로 신이 내려 무당이 된 강신무가 도당굿을 이끌었던 반면, 한강 이남 남부 지역에서는 대대로 무업을 이어 온 세습무 집안이 굿을 맡았습니다. 이들은 수원, 오산, 소사, 인천, 시흥, 안산, 광주 등 경기 남부를 단골판으로 삼아 활동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굿을 '경기 남부의 도당굿' 또는 '경기도 산이(화랭이)의 도당굿'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을굿의 뿌리는 멀리 고대 부족국가 시절의 제천 의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다고 백과사전은 설명합니다.
■ 화랭이와 미지 — 대를 이어 기예를 닦은 세습무 집안
경기도 도당굿을 이끄는 무당 집단은 세습무 집안이 중심이며, 남자 무당인 '화랭이'(산이, 사니라고도 함)와 여자 무당인 '미지'로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대를 이어 소리와 춤, 악기 연주를 연마했기에 음악과 무용에서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도당굿에서는 먼저 화랭이들이 줄을 타고, 기생의 소리와 춤까지 곁들여져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1990년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조한춘(趙漢春)이 있습니다. 경기도 김포 출신인 그는 외가가 세습무 계통이었고, 일찍 아버지를 여읜 뒤 이름난 세습무였던 의붓아버지 김종환을 따라 여덟 살 때부터 도당굿판을 다녔습니다. 김포 출신의 유명한 세습무녀 서간난(1903년생)의 사위이기도 했지요. 재담과 춤이 뛰어나 인기를 끌었고, 군웅굿이나 손굿, 뒷전을 할 때면 소리와 재담을 섞어 밤을 새워 굿을 했다고 전합니다. 장구 올림채에 일가견이 있었고 해금과 피리 연주도 뛰어났는데, 장구는 한성준에게, 피리는 양경원에게 배웠다고 합니다. 함께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이는 오수복(吳壽福)이었습니다. 1970년대 조사 때만 해도 한강 이남에 세습무 집안이 10여 집 남아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거나 연로해 겨우 명맥을 잇고 있다는 백과사전의 기록은 이 전통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끼게 합니다.
■ 당주굿에서 뒷전까지 — 하룻밤을 꼬박 새우는 굿의 순서
도당굿의 절차는 마을과 굿을 주관하는 무당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백과사전이 정리한 일반적인 흐름은 이렇습니다. 굿 전날 당주(堂主)의 집에서 '당주굿'으로 시작해, 당주집에서 굿당까지 올라가는 길에 부정을 가시는 '거리부정', 굿당 주변의 잡귀잡신에게 시루떡을 먹이는 '안반고수레', 굿 장소를 정화하는 '부정굿'이 이어집니다.
이어 신대를 꺾어 든 마을의 대잡이에게 신이 내리면 당 앞으로 가서 도당신을 모시고 굿청으로 돌아오는 '도당모시기'가 펼쳐집니다. 마을의 장승과 공동우물, 원하는 집을 돌며 마을과 집안의 평안을 비는 '돌돌이', 군웅마나님께 대취타를 연주해 올리는 '장문잡기',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굿을 잘 받으셨는지 시루가 쉽게 들어 올려지는지로 확인하는 '시루말'도 있습니다.
그 뒤로 제석청배와 바라춤을 추는 '제석굿', 군웅조상·도당조상·본향조상을 모셔 집안의 평안과 자손 번창을 비는 '본향굿', 화랭이들이 한 사람씩 나와 춤과 묘기를 보이는 '터벌림', 손님인 마마신을 위한 '손굿', 굿꾼과 무녀가 함께 추는 쌍군웅춤의 '군웅굿'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날이 밝으면 도당신을 다시 제자리에 모시는 '도당보내기', 고깔과 장삼 차림의 굿꾼이 노는 '중굿'을 거쳐, 굿판에 따라온 잡귀들을 풀어 먹여 보내는 '뒷전'으로 굿이 끝납니다. 당맞이, 돌돌이, 터벌림처럼 집굿에는 없는 거리가 들어 있고, 집굿에 보이는 산바라기굿이나 서낭굿은 없다는 점이 도당굿만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 부천 장말 도당굿 — 돌팡구지 바위와 외다리춤
오늘날 경기도 도당굿을 대표하는 현장은 경기도 부천시 중동의 장말입니다. 덕수 장씨(德水張氏) 집성촌인 이곳은 서간난 무녀와 그의 사위 조한춘의 당골판이었습니다. 한국전쟁과 새마을운동을 거치며 굿이 한동안 끊겼고, 장말도 예산 문제로 고사 정도만 지내 오다가 1980년 11월 사흘 일정으로 도당굿을 다시 열었습니다. 1982년에는 인천 동막 마을에서도 도당굿이 다시 열렸고, 1990년 국가무형유산 지정 이후 장말에서는 도당굿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장말 도당굿을 다룬 백과사전 항목은 이 굿이 2년에 한 번, 음력 10월에 열린다고 설명합니다.
장말에는 두 곳의 당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당은 '돌팡구지'라 부르는 바위를 신체(神體)로 삼았고, 할머니당은 개죽나무와 당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1984년 도시계획으로 할머니당이 헐리자 돌팡구지 뒤편에 새 당집을 지었고, 2003년부터는 가까운 중앙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시민들과 함께 굿을 열고 있다고 합니다.
장말 굿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도당할아버지의 등장입니다. 덕수 장씨 가운데 한 사람이 남자로 대물림되는 도당할아버지 역을 맡아, 한 다리를 들고 추는 '외다리춤(깨끼춤)'으로 도당신을 재연하고, 집집마다 가져온 쌀 위에 부채를 세워 한 해의 운을 점쳐 준다고 합니다. 도시화로 마을의 모습은 크게 바뀌었지만, 이처럼 덕수 장씨 집안이 공동체의 구심점이 되어 굿을 잇고 있다는 점이 큰 의미로 평가받습니다.
■ 한국 민속예술의 보물창고 — 도당굿이 남긴 가치
경기도 도당굿의 음악은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고, 장단은 호남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나름의 다채로운 독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춤 또한 제의성과 놀이성을 함께 품은 화랭이춤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군웅굿에서 부르는 '군웅노정기' 같은 무가는 판소리와의 연관성이 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도당굿의 시나위 음악과 탈놀이, 다채로운 무용을 두고 "한국민속예술의 보고(寶庫)"라 평가하며, 음악·무용·판소리·탈놀이·민속놀이의 관계와 발전을 연구할 수 있는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말합니다. 다만 옛날에는 사흘 넘게 난장을 여는 큰 축제였던 굿이 이제는 오전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에 끝나는 1박 2일 행사로 줄었고, 도시화와 함께 점차 공연의 성격을 띠어 간다는 변화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 마치며 — 마을이 함께 비는 마음
도당굿은 어느 한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우리 마을'의 안녕을 함께 비는 자리였습니다. 장승과 우물을 돌며 집집마다 복을 빌어 주고, 시루가 가볍게 들리면 신이 기뻐하셨다며 모두가 함께 웃던 풍경 속에는 이웃과 더불어 사는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혹시 부천이나 경기 남부에서 도당굿 소식을 듣게 되신다면, 신앙의 유무를 떠나 우리 조상들이 지켜 온 소리와 춤, 공동체의 마음을 한번 만나 보시면 어떨까요. 오래된 가락 속에서 지금 우리 마을을 다시 돌아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도당굿'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2316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천장말도당굿'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673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한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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