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귀나 낮은 언덕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 밑동에 왼새끼나 백지가 감겨 있고, 둘레에 금줄이 쳐져 있으면 그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국립민속박물관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전하는 대로, 당산나무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 온 마을의 수호목입니다. 오늘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산제」·「수목숭배」와 국가유산청·국가유산포털의 기록을 따라, 당산나무와 당산제가 어떻게 한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빌어 왔는지 천천히 들려드리려 합니다.
■ 당산, 당산나무, 그리고 마을의 수호신
당산(堂山)은 한 고을·한 마을의 지킴이신을 모신 성역을 뜻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는 당산이 주로 야트막한 언덕이나 산기슭, 낮은 봉우리에 자리 잡고, 그 중심인 당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여겨져 제사를 지내 왔다고 설명합니다. 나무 둘레에 금줄이 처져 있거나 밑동에 왼새끼·백지가 감겨 있으면 다른 나무와 쉽게 구별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목숭배」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목 신앙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연원이 오래된 것이 당산나무(당나무) 신앙입니다. 고대인들은 높은 산을 하늘과의 교섭처로 보았고, 돌무더기·신수(神樹)에도 천신이 깃든다고 믿었습니다. 그 산신은 호국신 또는 마을의 수호신, 곧 동신(洞神)·당신(堂神)이 되었습니다. 백과사전은 어느 마을에나 당산·당뫼·당골·당고개·당터라는 지명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만큼, 이 신앙이 뿌리 깊다고 적고 있습니다.
마을신앙의 대상 신은 막연히 당신·당산할머니·서낭님·산신님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당산제」 항목의 주석은 당산신을 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로 풀이합니다. 자연신으로서의 수신(樹神)과, 마을을 지키는 인신(人神)이 한 나무·한 당 안에 겹쳐 모셔진 셈입니다.
■ 정월 대보름의 당산제, 어떻게 지내나
당산제는 호남·영남 지역에서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신에게 풍요와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 제사입니다. 백과사전은 이를 당산굿·동제·당제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제일(祭日)은 음력 정월대보름이나 정초가 가장 많고, 10월 보름에 지내기도 합니다. 제사는 대개 자정을 전후해 시작해 새벽녘에 마칩니다.
제관은 생기복덕을 가려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 뽑습니다. 선정된 제관은 산가·상가 출입과 외지출타를 금하고, 궂은 음식을 피하며 목욕재계하는 등 근신합니다. 제일이 다가오면 당산나무와 당산석·신당 등 제장 주변을 청결히 한 뒤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몇 줌 놓아 부정을 막습니다. 제물은 화주나 제관집에서 준비하며, 대체로 메·주·과·포·편·채 등입니다. 비용은 마을 공동 제답(祭畓) 수입이나 집집마다의 추렴으로 마련합니다.
■ 유교식 제사와 매굿, 줄다리기까지
제의 진행은 주제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마을에서 뽑은 제관이 주제할 때는 제물진설·신주헌작·재배·당산축·소지·퇴식·음복 순의 유교식 절차를 따릅니다. 무당이 주관할 경우에는 제관이 헌작·재배·축문·소지 등 간단한 제를 올린 뒤, 무녀와 공인이 열두거리굿으로 이어갑니다. 백과사전은 대부분의 경우 유교식 절차로 행해지며, 풍물을 치는 매굿과 병행한다고 정리합니다.
농악대가 치는 매굿에는 마을제사의 시작을 알리거나 신을 맞아들이는 들당산굿, 제당의 잡귀잡신을 막고 쫓는 매구(埋鬼)굿, 제가 끝난 뒤 신을 보내는 날당산굿 등이 있습니다. 당산제가 끝나면 우물·창고·정자·다리 등 마을 공동 시설을 돌며 굿을 치고, 이어 집집마다 문굿·샘굿·조왕굿·마당굿을 올립니다. 이를 매구치기·마당밟기·지신밟기라고 하며, 당산제를 전후해 이틀·사흘 이어지기도 합니다.
■ '당산 옷입힌다' — 풍년을 감아 올리는 줄
당산제가 끝난 당일이나 이튿날 밤에는 마을사람들이 동서 또는 남녀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합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기는 쪽이 풍년이 드는데, 특히 여자 쪽이 이겨야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줄다리기를 마친 줄은 태워 논밭에 거름으로 쓰거나, 신체(神體)인 당산나무나 당산석에 감아 풍년을 기원합니다. 이를 ‘당산 옷입힌다’고 부릅니다. 줄을 감을 때는 부정을 가리며, 감아 놓은 줄에는 일 년 내내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합니다.
백과사전은 당산제의 특색을 유교식 제사와 매굿·줄다리기가 복합·병행된다는 점에서 찾습니다. 풍년과 평안을 비는 제의인 동시에, 마을 모두가 어울리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신성 기간 동안 얽힌 감정을 풀고, 일체감을 키우며, 노동으로 지친 삶에 활력을 주는 청량제 구실을 해 왔다는 설명입니다.
■ 천연기념물이 된 당산나무들
당산나무 가운데는 민속적·생물학적 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례가 많습니다.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경남 거창군 위천면 당산리의 ‘거창 당산리 당송’은 1999년 4월 6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수령 약 600년, 높이 약 13m, 가슴높이 둘레 약 4.1m의 소나무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미리 “웅-웅-웅” 소리를 내어 알려 주어 영송(靈松)이라 불렸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국권 상실(1910)·광복(1945)·한국전쟁(1950) 때에도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주민 전체가 보호 모임을 꾸려 관리합니다.
부산 북구 구포동의 ‘부산 구포동 당숲’은 1982년 11월 9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당숲으로, 수량 3주입니다. 이처럼 당산·당숲은 한 그루의 신목을 넘어, 마을이 함께 지켜 온 자연유산이기도 합니다. 국가생물다양성 정보공유체계 자료(2024년 2월 29일 기준)에는 식물 천연기념물 가운데 노거수 179건, 마을숲 25건이 포함되어 있어, 당산나무·마을숲이 자연유산 보호의 큰 축임을 보여 줍니다.
■ 당산나무 할아버지, 오늘날의 마을 지킴이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은 2022년부터 천연기념물 노거수를 중심으로 ‘당산나무 할아버지’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월간 『국가유산사랑』(2023.10.31)에 따르면, 이 제도는 마을 지킴이로 모셔지는 신격화된 당산나무를 관리하기 위해 시작된 사업입니다. 당산나무 할아버지는 인근 천연기념물의 상태를 상시 점검하고, 축제 등 행사 때 관리를 맡는 명예 활동 자격으로, 대부분 그 지역의 명망 있는 어른이나 이장이 맡습니다.
글은 농어촌 인구 감소·고령화 속에서 지역공동체의 결속력이 약해지면 천연기념물 관리도 어려워진다고 지적하면서도, ‘내 마을의 천연기념물은 내가 지킨다’는 참여가 보존과 공동체 문화를 함께 살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로부터 당산신·성황신에게 평안과 번영을 비는 의례가 자연유산을 지키는 장치로 작용해 왔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수백 년을 버틴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나무 아래서 금줄을 치고 풍물을 울리며 풍년과 안녕을 빌어 온 사람들. 당산나무와 당산제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목 신앙이, 오늘날에도 마을을 하나로 묶는 약속으로 남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정월 대보름 밤, 어디선가 당산나무에 줄을 감아 ‘옷을 입히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 오래된 마음을 한번 떠올려 보셔도 좋겠습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산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3900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수목숭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364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을신앙」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7416 , 국립민속박물관 아카이브 「당산나무」 https://www.nsac.or.kr/archives/concept/C00379 , 국가유산포털 「거창 당산리 당송」 https://m.khs.go.kr/public/commentary/culSelectDetail.do?ccbaAsno=0004100000000&ccbaCtcd=38&ccbaKdcd=16 , 국가유산포털 「부산 구포동 당숲」 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62103090000 , 국가유산청 월간국가유산사랑 「당산나무 할아버지」(2023.10.31) https://www.khs.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bbsId=BBSMSTR_1008&nttId=87186 , 국가생물다양성 정보공유체계 천연기념물 개요(2024.02.29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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